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조선문 독서사에서---(세번째 글입니다)

원평재 2005. 4. 1. 10:17

미국학교에서의 독서 지도는 원래 기원이 오래입니다.

이 사람들이 원래 실용적인 사람들이 되어나서 독립이래로 우리 동아시아 사람들처럼

무슨 공자님, 맹자님이 계신 것도 아니고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라는 사상이나

사유의 체계도 별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순히 reading, writing, speaking, 그리고 arithmetics

즉 셈하기 정도의 교육 목표를 세워놓고 소박하달까, 필수적이고 공리적인 교육

목표를 달성했는데 이럴 때에도 reading이라는 목표를 지상과제로 맨 앞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되느냐 하는 구체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그 지역사회가

갖고 있는 한계와 필요성과 사정에 따라서 개별 학교에다가 재량권을 주거나,

혹은 광역 교육 협의체에다가 더많은 자유 재량권을 주고 맡겼습니다.


예컨대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만 해도 지역에 따라 많은 편차가

있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미국적 자유와 모험심의 승화로 이 작품을 보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깜둥이”라는 표현과 비속어의 사용, 그리고 청소년의 지나친 방종과

일탈, 흑인을 폄하하는 듯한 대화와 내용 등을 문제 삼아서 아예 학교의 리딩

리스트에서 빼는 정도가 아니라 금서의 목록에 넣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후자의 경우에는 위대한 문학작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대표적 예라고 하겠습니다.

비속한 표현들은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넘어가는 시대적 분수령을

의미하였고 대화에 나오는 위악적인 분위기도 훌륭한 독서 지도가 있었더라면

기성세대의 위선적 양태를 고발하는 하나의 패러디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습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독서 목록에는 의례 성경과 초기 청교도 정신을

고취한 문학 작품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양차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마침내 월남전쟁의 수렁에 미국이 빠져들면서,

미국의 초기 건국 정신은 혼란에 빠지고 연속적으로 전쟁을 겪는 젊은 세대들은

보다 훌륭한 인문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시대정신도 이들을 선도할

힘을 잃었습니다.


1960년대 케네디 행정부가 들어섰을 때에는 우주 탐사 경쟁에서 구소련에 뒤쳐진

현상에 맞닥뜨려서 미국 교육의 위기를 부르짖으면서 새로운 뉴 프런티어리즘을

고취하다보니 미국의 학교 교육은 정상을 되찾는 듯 했으나 너무 엔지니어링,

즉 공학에서만 원인과 이유를  찾다보니까 교육 투자의 대부분이 과학 기술과 공학

쪽에만 편중되는 결과를 낳았고, 그러다보니 마침내 인문적 역사와 전통이 오랜

중국과 유럽과 인도의 대약진을 미국이 쫓아가기에 급급한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