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윤동주 시인 서거 60주기, 명동 생가터를 돌아보며(1)

원평재 2005. 5. 19. 08:39
 

윤동주 시인 서거 60주기, 명동 생가 터를 돌아보며(1)

 


 

 

힘이 좋은 지프 형 RV 차량은 두 가족 네 사람을 태우고 새로 포장한 시멘트 길을

잘도 달려서 왼쪽으로는 내내 두만강을 끼고 내려오다가 개산둔(카이산툰)을

바라보는 쪽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용정을 향했다.

 

십여 년 전 백두산 갈 때에는 “용정이나 연길이나” 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다시 보니 깨끗하게 정비된 모양으로는 용정이고 도시 규모는 연길이 훨씬

앞서있었다.

용정 초입에서 우리는 “전주비빔밥” 집으로 들어갔는데, 여기에서

“전주”란 말은 “전 조선족 자치주”를 석권한 비빔밥 집이란 뜻으로 연길에도

몇군데 같은 집이 있다고 한다.

설명이 음식점 옥호에 지명을 쓰지 못하는 새 규정 탓인지 모르겠다.

연길의 "홍콩 반점"은 "흥콩(興豆)반점"으로 바뀌었다.

시장이 반찬이라 먹을 만은 했으나 우리나라 다가공원 모악산 아래의

"전주비빔밥"에 댈 수야 있으랴.

 


 

 

용정 시내를 짐짓 벗어나서 우리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는

명동촌(明東村)을 향하여 먼저 달려갔다.

시내에서 명동촌은 다소 거리가 있었는데 논밭을 좌우로 하고 달리다보니

우람한 바위산이 앞에 보인다.

유명한 “선바위”로 원래는 세 봉우리였으나 최근에 길을 넓히면서 둘을

쪼개내고 하나만 남아서 전설의 내용도 비틀어지게 생겼단다.

 

명동 마을은 밝아오는 동이(東夷)마을이라는 뜻으로 선각자 김약연

義士(목사)께서 명동 교회와 함께 세운 터전으로 동주 시인의 생가 터와

인접하였다.

 


(바라보이는 건물이 옛 명동교회인데 지금은 박물관처럼 쓰이고 오른 쪽 비각이

김약연 의사의 공적비인데 비가 많이 상해있었다)

 

동네의 한가운데로는 “육도하(六道河)”가 흐르고 있었고 천주교 성당도

아직 번듯하였는데 중국 공민이 아닌 신분으로 얼씬할 수는 없었다.

명동 교회도 역사의 유산으로 존재하였지 아직 공개된 예배당의 역할은

아닌 터였다.

선각한 김약연 의사의 공적비는 시인의 생가 입구에 새로 세운 비각 속에서

흰 대리석의 자태를 나타내고 있었는데 문화대혁명의 거친 시대를 거치면서

동네 개울의 다리로 쓰이느라 모서리가 깨지고 새긴 글도 판독이 힘들었다.

김 의사는 사실 윤동주 시인의 외조부가 되는 분이다.

 


 

 

윤동주의 생가도 사실은 원래의 것이 아니고 90년대에 우리나라의 뜻있는

인사들이 복원 사업을 할 때에 인근 삼합에서 똑 같은 것을 사다가 다시

세웠다고 하는데(유연산 작, “혈연의 강들”), 일설에는 북한에서 사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작가 유연산 인민대회 상임위원이 산천어 횟집으로 초대해 주었다.

산천어는 양식이라고 한다. 이곳의 횟감은 대략 북한산이었다.)

 

아무려나 복원된 생가의 외양과 속 모양은 당시의 집모양이 모두 엇비슷하여서

똑 같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라고 한다.

 


 


 


 

 

집 마당에는 우물이 있는데 용정 시내의 용두레 우물처럼 용두레가 달린

샘물로서 복원 때에도 이가 시린 그 물을 마신 기록들이 있는데 지금은

시멘트를 발라서 보수를 하고 있어서 물을 마시지는 못하였고

그렇게 하는 속사정도 잘 알 수는 없었다.

 


 

 

 

너른 마당의 또 한켠으로는 씨름판을 벌일 모래판도 만들어져 있었는데

동네 놀이 행사인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는 행사 때에

한 판 잔치놀이를 벌이는 일과 관련이 있나보았다.

이론도 있겠지만 괜찮은 발상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문화에서의 카니발 요소가 없으면 유기체가 아니라 화석처럼 무기질화하지

않겠는가.

 


 

 

윤동주 시인에 얽힌 이야기들은 이제 설화의 경지로 승화되었고 그 설화는

다시 육화의 경지로 피드백하여 우리의 가슴을 적시는데,

다만 그가 누운 곳은 여기 용정 땅의 동산 묘지였다.

그 형제분들이 일찍이 묘 자리도 수습하고 건사를 잘하여놓았지만 오랫동안

국교의 단절에 따른 공백이 있었는데 여기 조선족 학자들과 손을 잡고

다시 그 음택을 찾아낸 이는 연변대학에 교환교수로 와있던 교도 대학의

오무라(大村益夫) 교수였다.

 

그 때 탐사를 함께한 이는 나도 자주 만난 연변대학의 김호웅 교수였고

그가 쓴 관련 글들에는 오무라 선생에 대한 감개와 평가가 남달랐다.

(『연변문학』 2004. 12월호 수필, 『서시』 2005 창간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