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철강계의 거목 宇巖齋가 자서전을보내왔습니다.
그는 내 다정한 친구이지만 성격이나 사는 방법은 사뭇 다르지요.내가 무르다면 그는 단단하였습니다.
내가 좀 멋대로라면 그는 결코 멋대로가 아니지요.소프트와 하드가 어울려 인터넷 한마당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책을 받으며 강렬한 느낌과 회고가 있어서 얼마전에 썼던 그에 관한 글을 여기 올려보고 싶었습니다.
그의 회고록 제목은 "원칙 그리고 도전"입니다.
宇巖齋의 주인, P형의 서재에 공식으로 초대 받은 것은 이번으로 두번째였다.이태 전 처음 초대 받았을 때에는
당시 국가 기간 산업의 CEO를 자의에 의하여 임기전 퇴임하고 일생의 꿈이었던 서재를 꾸몄다는 설명과 함께
초대를 받아서, 사실은 내가 서재의 손님이면서도 괜스레 서재 주인인 그를 지성의 전당으로 안내 하는듯한
벅찬 기분도 없지 않았었다.
그가 이 글을 읽으면 껄끄럽게 들릴는지 모르겠으나 먹물의 속성이 그런 것 아닌가.
하여간 내가 공연히 신바람을 냈었다.강남 중심부에 있는 그의 서재이자 작업공간은 오거서 만권당(五車書 萬券堂)에는
못 이를까,역사 철학서 쪽으로 방안이 빼꼭히 채워져 있어서 이 조직적이기로 이름난 경영인이 앞으로 어떻게
이 지식의 보고를 경영해 나갈까 자못 외경과 염려와 호기심이 함께한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서울 근교로 나갈까 생각도 했으나 늙으면 친구가 가까이에서 필요할듯 하여 아예 도심으로 들어와 버렸어"
그가 묻지도 않은 부분을 미리 설명했었는데 역시 의표를 찌른 감이 없지 않았다.
오피스 텔 입구 쪽에는 씩씩하게 생긴 여비서가 앉아 있었는데 이태가 지난 지금도 씩씩한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뭐랄까 조금 달라지긴 했는데---.
그래 조금 원숙해졌달까, 달콤해졌달까."여비서가 꼭 있어야 독서가 되나?"
처음 초대 받았을 때에 우스개 소리를 할려다가 내 친구의 분위기가 너무 진지하여서 말을 꿀꺽 삼켰던 기억도 난다.
이후 몇차례 우암과는 서재의 밖에서 밥을 먹는 등,만날 기회가 있었으나 그 농담같은 의문문은
결코 입밖에 내지 못했다.
역시 그의 독서에 대한 진지함과 엄숙함 때문이었다.
그가 순수한 독서의 열정에 아울어서 다른 방면을 도모하는듯한 인상을 주었다면 여비서 부분의 질문이나
농담이 가능했을는지도 몰랐으리라.
국회의원 출마라던가, 무슨 지방자치제 같은데에라도---.
이번에 그가 나를 초대한 이유는 일단 五車書 萬卷堂의 책을 2년여만에 독파하였는데,
그다음 독서 방향의 설정에 도움을 줄 수는 없겠는가---,
그런 취지의 대화 국면을 화두로 띄운 것이었다.친구끼리라고 그냥 술과 밥을 퍼먹을 것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이 방면의 언론계 먹물과 교수, 연구소의 연구원재야에 쟁쟁한 지식인들 이런 사람들을 좀 함께하여
자유 방담을 하고 싶다는 부탁이었다.
문득 나에게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 과학사 학회" 사람들이었다.
기록이 절대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도 특히 과학과 공학 분야는 황야라는 표현조차 무색할 지경이다.
황야나 사막에는 오아시스라도 있지 않은가---.
아니 우리에게도 오아시스로 비유될 수 있는 인물이 있긴 있나보았다.
역시 세종대왕이었다.
자격루 즉 물시계를 비롯하여 당시의 천문지리의 관찰과 측정과 표준화 등의 제원들이 그나마 아쉬운 데로
여기저기 흩어진 상태로 남아있는 모양이고 과학사 학회에서는 이것들을 모으고 재현하고 줄기를 잡고,
낑낑대는 모습을 최근에 보여왔는데
내가 여러차례 이런 장면과 조우(遭遇)한 경험이 있었다.
"여기저기 들 쑤셔대니까 조우도 많이하네"
내가 그들과 글마당이나 현실 마당에서 조우랄 때마다즐거운 농담을 하였었다.
"천만에! 아는만큼 본다는, 느낀다는, 조우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들중의 보스가 되받은 말이었다.
나는 과학사 학회장과 간사, 그리고 한국 돈황학회장을 동반하였고 우암재의 주인은 우리가 함께 아는 외우,
국립의료원장을 불러내어서 인문과학이 결여할 수 있는 분야를보충코자 하였다.
대학의 전공은 물론이려니와 평생을 경영쪽만으로 돌았으되 역사-철학 쪽에 밝은 눈을 뜨고자 미련을 갖고있었다는
우암재의 술회는주로 중공업/국가 기간 산업쪽에 최고경영인을 했던 경험담과어우러져서 날줄과 씨줄이 연결되는
분위기라고 자축을 하는 건배의 크리스탈 소리는 청아하였다.
만년의 독서를 위하여 눈을 아끼고자 청년시절 부터 주요 서류와 전문서를 읽는 것 이외, 뉴스 같은 것은 신문 보다
라디오를, 그리고 TV 등도 멀리했다는 그의 주장은 이전에도 두어차례 들은 바 있었지만 새삼 경이로웠다.
누구나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있겠지만 문제는 의지가 아닌가.그는 그런 점에서 승자였다.
"사사로운 정담이라고 전제 하고 말씀드리자면, 저는 하루, 한 주, 한 달, 일년, 일생 등의 목표와 그 달성을 위한
과제를 미리 쪼개어 분석해 놓고 살아왔습니다---.
"독서를 시작한 첫해에는 하루 여덟 시간을 책읽기에 바쳤는데 눈이 조금씩 나빠져서 이제는 안과의사의 조언에 따라
하루 다섯 시간만 책을 본다고 그는 말했다.
그의 눈빛은 형형하였는데, 가벼운 재담과 익살과 육담이 섞여있어서 좌중에는 아연 활기가 돌았다.
밀담은 아니었지만 의기투합한 사사로운 정담을 밖에다 이렇게 흘리는 나는, 말하자면 이날 저녁의 도원결의 분위기에서
보면 반역자에 다름아니었다.
아니 훌륭한 세작(細作) 노릇도 하지 못하였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날 우리들은 동서와 고금의 위대한 사상과 저술에 대하여 고담준론을 나누었으나 과음과 무심한 나의 성격으로
자잘구레한(아니 자잘구레 하다니!) 부분들은 그 깔끔한 일식집 다다미 위에다 던져두고 나와 버렸으니---.
이날 과학사 학회 쪽 사람들은 세종대왕의 위대성에는 위대한 사상과 철학의 바탕이 있음을 재조명하였고,
돈황 학회장은 막고굴에서 파낸 고문서 가운데에서 설화적 요소가 있는 내용을 아예 소설로 재구성한 책을 우리 모두에게
증정하며 재미있는 내용들은 일부 구수하게 소개하였다.
의료원장 역시 서양의학으로 우리나라 도규계(刀珪界)(술김에라도 칼잡이라는 말까지는 진전되지 않았다!)의 최 선두에서
분투 노력하고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우리 한의학의 신비함과 미지의 장에 대하여 깊은 관심과 아울러 고뇌가 따른다고
술회하였다.
이날 저녁 우리가 내린 잠정적 결론은 아무리 熱讀을 하여도 미래 예측은 어려우리라는 것,
그러나 미래를 향도하겠다는 자세라면 거대한 인류사의 대하(大河)에서 "나노(NANO)의 척도"만큼이라도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겠고, 그것이 바로 미래 예측의 한 수단이 되지않겠는가---하는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암이 부탁하였다.
"제가 읽은 독서 리스트를 보내드릴테니 새로 읽어야할 리스트를 20권씩만 적어서 보내 주십시오."
다들 쾌락하였다.
고조된 분위기에서 몇권의 책명이 나의 머리를 스쳐갔다.
하지만 빛나는 책이름도 열권을 넘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우기 기존의 우암재 리스트는 일단 제외해야 하는
높은 허들이 존재하지 않은가---.
나는 저 단아한 우암재의 서가에 몇권의 책을 더 얹을 수 있을까?
연꽃보러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