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올리는 팩션은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3회를 따로 따로 보아도 별개의 팩션 단편으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졸작이지만 특히 형식에 실험적 시도가 들어갔습니다.
"출판사-청담"이라는 이름으로 시원치 않은 "종이장사"를 하며 지내는 내 평생소원은
남의 주머니에서 월급을 받으며 사는 일이다.
여기서 "종이장사"란 출판업을 말하고 월급쟁이를 탐한다는건 이 장사가 하도 힘이
들어서이다.
"출판사-청담"이라고 하여"거꾸로 미학"처럼 작명을 한 것은 멋을 부렸다라기 보다
자고로 출판사 이름에 "청담"이라는 두글자가 우후죽순처럼 많아서 "청담 출판사"로는
문광부 등록이 어렵고하니, 그렇다면 이 참에 흔한 이름으로나마 무언가 차별화하여
세상의 시선을 끌어보자는 꼼수가 들어간 것이다.
하필이면 "청담"이냐고 하겠지만 그 두 글자를 고집한 것은 강남 개발 초기에
선대께서 도산 공원 근처, 청담동에 큰 집을 장만하시고 이내 작고하시는 바람에
지하부터 2층까지는 고깃집으로 세를 주고 다락방에서 내가 "종이장사"를 시작한 내력
때문이었다.
종이장사를 하지않고 세 받은걸로 먹고만 살았으면 강남 갑부의 반열에도 올랐을지
몰랐는데, 내 천성이 인문정신, 아니 그런 거창한 표현말고 글쟁이 끼가 있어서
도서출판으로 가산을 탕진하며 살아 온 셈이었다.
하기는 어려울 때마다 집을 팔아 빚을 갚으라는 유혹이나 협박에 마음 약한 내가
넘어갈 뻔 했으나 일편단심으로 집을 지켜낸 마누라의 공덕은 죽간(竹簡)에
새겨서라도 자손대대로 보존했으면 싶다.
아니 죽간이 무언지도 모르는 다음 세대에게 DVD로 구워놓기라도 해야할는지--.
하지만 자식들은 역시 제 어미의 선견지명으로 모두 조기 유학을 떠나버렸으니
나중에 죽간이나 DVD에 새겨놓은 한글이나 한자로 된 제 어미의 칭송을
읽어내기나 할는지 모를 일이다.
하기는 칭송이나 송덕문을 쓰기에 앞서 한번 따져보기는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주로 인문학 출판으로 가세를 탕진하고 있는 남정네를 능멸하면서 꿋꿋이
위기의 일가(一家)를 지켜나가는 내당의 엄처가 대견한 것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강남불패"의 신화 덕분에 누구라도 먹고사는 일이 가능한건지는 대저 나같은 숙맥
백면서생으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는 일이다.
하여간 그렇게 평생을 살다보니 허구한날 출판이 될만한 글을 얻으려고
닥치는데로 문인들을 만나 교제 술을 사거나, 일년 열두달 배낭을 매고 지방
소도시와 산골 마을을 다니며 무슨 재미있는 옛 전적이나 기서(奇書)라도 없을까
기웃거리는것이 나의 평생 생업인지 취미인지가 되어버렸다.
그런 어느날, 강원도이던가 경북 북부 지방이던가 어느 소도시의 향토 자료관을
뒤졌더니 너덜거리는 문집 비슷한 데에 "동하국 왕비와 하룻밤 운우지정을 나눈
기이한 체험"이라는 긴 제목의 "야담과 실화", 혹은 "믿거나 말거나" 비슷한
내용의 글이 있었다.
문집은 어느 지방 인쇄소에서 거칠게 만든 것으로 "ISBN"도 없는 상태라서
독자들을 끌 내용이라면 막 베껴먹어도 뒷탈이 없을 것 같았다.
미국의 식민지 시대나 독립 초기에는 지식인이라면 청교도 설교문이나 근면
성실을 강조하는 공리적 처세훈 같은 글만 발표해야 사회적으로 별 탈
없이 살아갈 수 있었지, 글쟁이의 신바람으로 앞뒤 재지않고 선남선녀들의
감상적 상상력을 건드릴 내용을 발표했다가는 그 지역사회에서 실없는 건달이나
폐인으로 낙인 찍히기가 십상이었다.
그러나 글쟁이가 예나 지금이나 이런 수신교과서 같은 글만 쓰고서야 어찌 그
성정이 베겨날 수가 있으랴.
그들은 필경, 필명이라는걸 만들어 몸을 숨기고 속세의 주제로 글을 써냈다.
"스케치 북"을 쓴 워싱턴 어빙의 예를 들자.
그는 우선 거룩한 자기 이름은 감추고 때로 "디드릭 니커보커"라거나
또 때로는 "제프리 크레온(Geoffrey Crayon)"이라는 필명을 만들었다.
디드릭 니커보커는 당시 뉴욕에 흔한 화란인의 이름이었고, 또다른
가명인 "제프리 크레온"에서의 "제프리"는 문호 "제프리 초서"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였으며 "크레온"은 원래 색연필이 아니라 고상한 프랑스어로 연필,
펜을 뜻하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의미심장한 작명이었던가.
이런 장치 속에서 그는 "디드릭 니커보커가 쓴 뉴욕의 역사"라는 좀 해괴한
내용의 역사책을 쓰면서 내용상의 실없는 책임을 니커보커라는 화란인에게
떠넘겼고,
더 잘 알려진 그의 작품 "스케치 북"에서는 원래 "제프리 크레온"이라는 사람이
그 책을 쓴 것으로 해두었다.
책의 서문에 따르면 워싱턴 어빙은 "어느날 뉴욕 뒷골목을 어슬렁 거렸는데
화란어로 된 기서(奇書)가 하나 손에 들어와서 자기같이 점잖은 지성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지식인의 역할 삼아 영어로
옮겼노라"고 장황한 변명을 시침 뚝 떼고 내 놓는다.
이중 삼중의 자기 보호막을 친 셈이다.
지식인이나 글쟁이의 위치란 어느 세월에나 한 떨기 백합처럼 이토록
약하고 가련한가.
천만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게 모두 자기 체면을 건사하자는 간사한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
하여간 종이장사인 내가 강원도이던가에서 발견한 그 요상한 문집의 지은이를
새삼 살피니 이런, "김시습"이라고 되어있지 않은가.
금오신화의 김시습이라---,
필명을 이쯤으로 배려하며 몸을 감추었다면 예사로운 작자는 아닌듯하였다.
마광수라는 사람이 "광마 일기"라는 소설을 쓰면서 금오신화의 내용을 적절히
현대화한 부분이 있었지만, 하여간 무슨 왕비와 하룻밤을 잤다는 이 문집 속의
지은이도 만만치 않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나는 얼른 글을 훑어보았다.
그랬더니 더욱 놀라운 것은 김시습이라는 가명을 쓴 것이 단순히 남녀간의
운우지정을 그리는데 따른 체면 지키기가 아니라 당시 "동북 공정"에 매달린
중국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원모지략임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글의 초두에 남녀간의 몸 사랑 관계를 조금 적나라하게 묘사해
넣어서 필명을 쓴 이유가 그런 부분 때문인가 하였으나 그것은 독자를
유혹해 끌어들이는 서술 기교에 불과하였고 바로 그 중국과의 복잡미묘한
국제관계를 염두에 두고 둘러친 깊은 보호 장벽이 작가의 이름을 가면의 뒤로
사라지게 만든 것이었다.
정말 놀라운 가면쓰기였다.
설명이 길어졌지만 하여간 그래서 이 팬터지 같은 소설을 조금 손질하여
내 이름으로 올려본다.
작가를 누구로하느냐에서 다소의 망설임은 있었으나 소송을 각오하고
"청담" 원작으로 했는데 아마도 소송을 제기할 작자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
그건 확실하다.
왜냐고 묻는 숙맥이 세상 어디에 있으랴.
(계속)
'팩션 FAC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비와의 하룻밤 (연재 세변째 글) (0) | 2006.03.01 |
---|---|
왕비와의 하룻밤 (2회) (0) | 2006.02.27 |
후쿠오카의 "후유노 소나타" (겨울 연가) (마치는 회) (0) | 2005.02.08 |
후쿠오카의 "후유노 소나타(겨울연가) (4-3) (0) | 2005.02.06 |
후쿠오카의 "후유노 소나타(겨울 연가" (4-2) (0) | 2005.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