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의 큰 젖무덤이 해동(海東) 유학(儒學)의 마지막 계승자를 자처하는
강세출 "향사모" 총무의 코 앞, 아니 코 위에서 출렁거렸다.
그러니까 지존의 왕비께서 그의 배 위에 올라타고 노를 젖는 형국이었다.
묘한 향기가 왕비의 몸 전체에서 흘러나왔다.
샤넬 파이브 같기도하고 알뤼르(allure), 곧 유혹을 뜻하는 이름의 향수 같기도
하였다.
아니, 정확하게 밀하자면 크리스창 디오르에서 나온 "듄느", 그러니까 복합-
사향냄새에 가까운 황홀한 최음의 향기였다.
"왕비께서는 서양에서 온 향수, 듄느를 애용하시는군요. 해동 육룡이 나라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그가 헐덕이며 잠시 말하였다.
"아이, 듄느가 무언지---, 저는 사향 주머니를 차고 있어요."
과연 왕비는 S자 곡선의 허리와 허벅지의 경계선에 명주를 가늘게 꼬아서
만든 실오라기 끝에 손톱만큼 작은 예쁜 비단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백옥같은 피부위에 대롱거리는 손톱만한 주머니가 그의 성욕을 더욱 자극
하였다.
그 대롱거리는 모양이, 또 그 속에서 나오는 신묘한 향기가---.
"향사모"의 총무를 맡고 해동 유학의 마지막 계승자를 자처하는 그가 오묘한
향수(香水)의 세계를 터득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 같지만 성현도 시속을
따르랬다고---.
지방에 떠도는 티켓 다방 아가씨들을 선도한답시고 그 유혹의 소리를 귀동냥한
것과 그 은은한 향기를 먼발치에서나마 맡아본 실력이 근묵자흑(近墨者黑)이요
주묵자적(朱墨者赤)이 되어 시방 동하국(東夏國) 왕비를 품에 안은 자신의 격을
높이는 진정한 실력이 될줄은 정말 예전에는 미쳐 몰랐다.
"향사모"라고 하면 "향토 사학자 모임"이라고, 이제는 꽤 알려진 한-중 양국에 걸친
전국적 규모의 재야 학술 단체이다.
그들은 주로 지방의 공무원이나 초중등학교 교사들 중에서 역사적 안목과 관심을
갖고서 평소 그 지역에 관한 전적(典籍)이나 구전등을 연구하여 웬만한 역사 교수나
사학자들 보다도 특정 지역에 관한한 더 깊은 식견과 지식을 계발한 사람들이었다.
종친회의 종답이 갑자기 신도시로 수용되면서 생긴 큰 기금을 관리하게된 강세출
선생도 말하자면 그런 사람이었다.
다만 나이 들어 정년 퇴직을 한 것은 아니고 종단에서 권하는데로 초등학교 교사
직에서 중년에 명예퇴직을 한 다음, 종단의 일과 향토 사학의 계발에 전념을 하는
큰 일꾼이어서 어디에서나 항상 발언권이 센 편이었다.
그는 정신도 맑았지만 힘도 천하의 장사였다.
"향사모"의 이름은 중국의 동북공정 때에 그 빛을 발하였다.
대학의 교수들과 국책 연구소의 사학자들이 중국의 동북 역사 왜곡 정책에 가열찬
항의를 제기하다가 어느 순간 그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였다.
물론 모두가 다 그런건 절대 아니었지만 동북공정이 외교문제로 비화되고 또
대부분의 역사 학자들이 중국의 사학계 및 동북 3성에 있는 연변대학이나 길림 대학등
중국 명문 대학들의 역사 교수들과 협동 연구 과제를 공동으로 수행하는 입장이
되다보니 어느날 갑자기 항의의 목소리를 자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연구비는 한국의 기업이나 정부에서 출연하고 있지만 한국의
교수들 입장에서 보면 치열한 경쟁에서 연구비를 따 내기 위햐여 중국 대학의
교수들과 협동 연구의 포멧으로 연구 계획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중국의 동북 공정에
큰 목소리를 내어 항의하는 교수가 그런 협동 연구의 카운터 파트를 중국에서 찾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조선족이든 한족이든 중국 대학의 교수들도 동북공정에 항의의 목소리를 크게
내는 한국의 연구 팀에 합류하기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아니 연구비 타내기의 문제 쁜만이 아니라 자칫하다가는 연구의 대상이 되는 중국
입국 자체가 어려워질는지도 몰랐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제도권의 사학자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몸을 낮출 수 밖에
없는 때가 도래한 것이었다.
그런데 "향사모"의 입장은 이때부터 돋보이기 시작하였다.
원래 향사모는 중국의 동북 3성에 사는 조선족 향토 사학자들과도 긴밀한 연계를
갖고 있었다.
조선족 향토 사학자들도 주로 초증등학교 교직에 종사하는 분들이었고 중국 대학의
제도권 사학 교수들과는 역사 인식이나 접근 방식이 달랐다.
동북 공정 때에 북경에 가서 호텔에 머물며 그 작업을 한 사람들이 다 그 방면에
지식이 풍부한 조선족 교수들이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심지어 자기들끼리는 업적을 으스대기도 하는 것을 들은 사람도 더러있엇다.
물론 중국어로 하는 말이었지만 중국어가 이지음에는 세계어가 아닌가.
이런 분위기와는 달리 중국의 조선족 향사모 지사(志士)들과 고구려, 발해의
유적을 함께 답사, 발굴 작업을 하는 활동은 일종의 정신적 고토 회복 작전이었고
잃어버린 강역에서의 민족 독립 운동이나 다름없이 비장감이 있었다.
다시 말하여서 동북 3성의 향토 사학자들은 우리가 잃어버리고 두고온 고구려
발해의 유민들 같았고 타임 머신을 타고 다시 돌아온 일제 강점기의 민족 지사들,
혹은 독립군들이었다.
한동안 고향의 종답과 선산(先山) 일부에서 굴러들어온 큰 돈으로 선영묘역의
대토를 확보하고 그 유지 관리에 온 힘을 쏟아 온 강세출 선생은 이런 일들이
제자리를 잡자, 이제는 향토 사학자로서의 자질을 서서이 키워나갔고 이어 동복
3성에 산채한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에도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런 관심의 첫 단초는 종단의 임원들이 중국 관광을 갔다가 흑룡강 성에 있는
"청양 강씨 마을"을 우연히 발견하고나서 부터였다.
알고보니 일제강점기에 청양 강씨도 강제로, 혹은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햐여 자의로 동북 3성에 많이 들어가 살게 되었는데 광복 후에도 나오지 못한
후예들이 상당수 남아있었다.
이들은 주로 같은 고향 출신들 끼리 많이 몰려 살았는데, 그러고보니 안동 마을도
있었고 청주 마을, 순천마을 등등과 아울러 "청양 마을"이라고 할만한 씨족 농촌
마을도 발견된 것이었다.
그들의 생활은 문화혁명의 소용돌이가 끝나고 얼마동안은 가난하다는 점 말고는
아름다운 씨족 농촌 생활을 잘 영위해 왔으나 차츰 외부 세상 특히 고국인 한국이
잘 산다는 것이 알려지고 또 중국에서도 연안 공업지역에 한국 기업들이 투자를
하면서 젊은이들은 서둘러 빠져나갔고 결국 지방 농촌 마을은 급속하게 황페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안동과 청주와 순천 사람들이 고향 출신 조선족들을 돕기 시작한 것보다는 훨씬
늦게 청양 강씨 마을에 대한 고향 씨족 사람들의 관심도 일어났으나 때는 이미
많이 늦어서 별로 손을 쓸 여지가 남아있지않았다.
젊은이들은 한국으로 나가서 날품팔이가 되었거나 상해, 심천, 주해를 잇는 트라이
앵글 지대로 나간 경우에는 배운 사람들은 LG등 큰 회사의 사무원으로, 못배운
축들은 그나름의 노동자로 다 나가버리고 마을에는 노인들만 남아있었다.
자연히 농토도 새로 들어오는 한족들에게 팔거나 빌려주고 조선족 마을은 거의
붕괴상태에 놓여있엇다.
고향 방문단을 조직하여 관광 여행을 시켜준 것도 한두번이었고 그나마 갖고온
한약재를 팔지도 못하고 되갖고 간 사람들의 원성만 심하였다.
강세출 선생은 이제 이런 소아적인 일에서는 손을 떼고 마침 때마추어 난리가 난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서 고구려 발해 우리민족 고토의 역사 찾기에 팔을 걷어
부치게 된 것이다.
이런 복잡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강세출 역사학자의 행보는 참으로 돋보였다.
거국적이던 중국 동북 공정에 대한 항의의 물결이 시들해지기 시작하면서 그는
양국의 향사모를 조직적으로 움직여서 고구려 발해 산성 찾기, 지명의 유래 찾기.
사라져가고 있는 민담과 전설 채집하기, 우리 민요와 속요 모으기, 중국의 역사서,
예컨데 당서와 후당서에 나오는 고구려 강역 고증하기와 또 중국 사서의 모순점
찾아내기 등등의 운동을 지속적으로 펴나가며 우리 언론과 학술 저녈에 시도때도
없이 발표를 하기 시작하였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듯이 생각지도 못한 난관들이 나타낫다.
관계에서의 은근한 우려는 외교적 차원에서의 필수적인 관심이라고 치더라도
심리적 압박감으로 와닿지 않을 수 없었고 제도권 역사학회에서의 무시하는
태도와 전문 학술지에서의 향사모 괄시하기도 노골적이었다.
중국쪽 향사모에서도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족 공안당국에서의 비상한 관심표명이 시작되었다는데 그쪽 체제에서의 관심
표명이라는 것은 위협적인 분위기에 다름아니엇다.
다만 그쪽도 지방 자치와 분권이 차츰 이루어지면서 만사가 케이스 바이 케이스,
인간 관계, 소위 "꽌시(關係)"의 차원이라는 묘미는 있었다.
자칫하면 역사고 무엇이고 중국으로의 내왕 자체가 위협을 받아서는 곤란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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