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는 고향의 초등학교 두어해 후배였는데 맹렬여성이었다. 어쩌다 그 시골 깡촌에서 그런 대단한 여성이 나왔는지 동네 앞산의 야산 정기라도 타고난건 틀림없었다. 미군 기지촌 주변을 어슬렁거린다는 악성 소문까지 돌던 그녀는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어찌어찌 마침내 디자이너로 자리를 잡았다. 소문으로는 미국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었다는 말도 돌았으나 그건 물론 잘 모르는 사람들의 헛소문이었다.
오래 전, 내가 뉴욕에서 영사로 잠시 근무할 때 알아본 바로는 맨해튼의 패션 애비뉴라고 불리는 6번가에서 꽤 잘나가는 패션 디자이너로 이름을 쌓고있었다. 그가 운영하는 패션 회사는 재미있게도 브라이언트 파크 옆, 그레이스 빌딩 바로 옆에 있었다. 여성의 긴 치마폭처럼 생긴 인상적인 그레이스 빌딩이 마침 그옆에서 회사를 연 그녀의 이름과 같았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녀도 할머니 소리를 듣는 동양계 디자이너의 대모로서 중국계의 "안나 수이(西)"와 " "베라 왕" 등에게 큰 영향을 준 선구자였다.
그녀의 딸이 또 그 곳 어떤 미술관에서 한 이름하는 큐레이터로 있으니까 어쨌든 문학 관련의 이야기도 한번 알아볼 길은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맞네. 시장통 떡쟁이 딸, 정경순이---, 그레이스 정 말이지. 그 쪽으로는 자네가 줄이 좀 닿지 아마. 어릴 적에는 그녀가 나를 더 좋아했는데 이제는 내가 영어도 그렇고---. 자네하고 소문이 좀 있더군. 조심하게, 공직자가---." 박 교수도 대뜸 동의하였지만 한 자락은 또 깔았다. 외국에 나가면 다 연락이 닿는줄 오해하는 우물안 개구리, 박 교수가 평소 떡쟁이 딸 이야기만 나오면 공연히 질시의 시선을 보내더니 선뜻 내 제안에 동의하는걸 보면 팩션과 관련한 그의 마음 상태는 꽤 심각한 모양이었다.
묻지마 관광 버스는 이제 본색이 들어나고 있었다. 여주 신륵사와 세종대왕능을 단숨에 달려간 일행은 일단 현지 에서 점심과 또 술 대접을 받았다. 한 참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일단의 청년들이 나타나더니 할머니, 아니 할가씨들의 손을 잡고 부비며 "실키 로션"을 사서 발라보라고 했다. 선양회 회장도 "시루끼 로숀 구리무"가 특허품이라고 하며 짝궁인 오빠들이 선물을 하라고 부추겼다.
처음에는 일행들의 구매력이 시원치 않았는데 짝꿍 전술이 슬슬 먹혀들어서 일행의 반인 할아버지들이 모두 한통씩 샀다. 이게 무슨 강매 짓거리냐고 박교수가 항의 비슷하게 하다가 오히려 일행으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이렇게 훌륭한 자리를 마련한 분들이 권하는 것을 사지 않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분위기는 마침내 비싼 보약을 파는 터전이 되었고 나아가서는 없어도 좋을 싸구려 물건들이 고급이라고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분위기 덕분인지 우리 두사람에게는 그런 바가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세종대왕 밀릉, 그러니까 비밀의 능이라는 곳을 잠시 들렀다. 밀릉은 빈말이고 아마도 신도시로 개발되는 곳에 있는 어떤 씨족의 선산이 대규모 이장을 하는 낌새였다. 이 씨족 책임자들과도 돈이나 공짜 상품이 오갔을 것이다.
"노인 선양회" 회장의 설명은 이렇다. 역사적 고증에 따르면 이 곳은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 반포하실 때에 명나라의 반대가 하도 극심하여서 어쩌면 생전에 비극적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고 아니면 사후에라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상용 가묘 상태로 유지되어 오던 곳인데 최근에 대왕께서 이토록 현실적으로 곤고했음을 알게 되면서 숭모의 정신이 더욱 불타올라 이렇게 새로 중수, 단장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럴듯한 설명이었으나 사실로 믿기에는 의문이 많았는데 그걸 따지는 사함은 하나도 없었다. 나와 박교수는 약이고 뭐고 하나도 사지 않으면서 의혹의 말과 잔소리를 늘어놓다가 나이많은 일행으로부터 핀잔과 꾸지람을 크게 듣고는 입을 봉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황혼이 되면서 일행은 이천에서 좀 시시한 온천장에 들어 가서 때까지 벗기는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저녁식사가 또 나왔다. 이제는 좀 허술하게 나온 한정식을 얼른 먹고 박 교수와 나는 벌을 서는 아이들처럼 남들 보다 일찍 밖으로 나와서 휴대폰을 열고 미국의 그레이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차를 극복하고 전화는 금방 연결되었다. 새벽인 모양이었다.
"정 여사, 거두절미하고 우리 고향 스타에게 하나 물어봅시다. 큐레이터인 따님에게 문의해서 알려주어도 좋겟고---. 그레이스 여사! 팩션이라는 어휘에 대해서 아시거나 들은바가 있는지, 잘 모르시면 따님에게 물어서라도 그런 말이 쓰이는 경우를 좀 알려주시면---." 고맙겠다는 끝말을 붙일 필요도 없었다. 그레이스의 총알같은 답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오우 마이 갓! 그걸 어떻게 벌써 아셨어요? 역시 이 대사님은 국제통이셔요. 여름 컬렉션 소문이 벌써 나갔네요. 이번에 여기에서는 뉴욕 서머 컬렉션을 여러 패션 회사에서 함께 모아서 벌이기로 했잖아요. 유럽과 도꾜, 이제는 중국 북경까지 추격이 심해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네요. 그래서 뚱뚱이 안나 수이, 깔끔이 베라 왕, 혼자 된 다나 캐어런 등등이 따로 컬렉션 발표를 하지 말고 함께 한번 열어보자, 이렇게 말이 오가다가 합동 이벤트를 벌이게 되었지요. 최종 타이틀은 '팩션 쇼우'로 결정났어요. 팩션이란 뜻 아시죠? 찢어발기는 것, 파벌, 족벌, 편먹기로 자기 영역 고수---. 그게 팩션이잖아요. 그걸 인정하면서도 한번 모아서 종합 쇼우를 하자. 그러니까 '팩션 패션 쇼우'인 셈이죠. 일종의 게릴라 패션 쇼우를 한데 모은거라고 컨셉을 갖여도 좋아요. 팩션 쇼우! 섹시한 타이틀이죠? 이 대사님도 박 교수님이랑 한번 왔다가세요. 게릴라 스트리트 쇼우의 진수를 모두 모아서 맞볼 수 있도록 지금 심혈을 기우리고 있거든요."
디자이너 그레이스의 총알같은 이야기를 다 옮길 재간은 없다. 팩션의 선구자를 자처하며 목말라하는 내 친구 박 교수에게 무어라 설명을 해야할지도 당장은 마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팩션"이라는 말이 문학 장르의 한 축으로 고고하게만 남아나지 않고 닳아지는 말, 서서히 망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다음날 맑은 정신에 전달만 해도 이 국문학자의 얼굴에서 미소를 발견하기는 쉬울듯도 싶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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