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모어에서 온 여인 1 / 1993 / 38 x 46 / 종이에 채색 |
나보다 이십년 연상의 연인을 인천 공항에서 "납치"하여 현대 화랑의 천경자 전을
보러갔다.
'납치'란 내 표현이고, 사실은 "모시고"란 말이 맞을 것이다.
내 연인은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는줄 착각을 하는
자연과학자이다.
물리학을 하면 모든 방면에 물리가 터지는 거라고 평소에도 호언장담하며 그는
철학을 위시하여 손을 대지 않는 데가 없지만 다른건 몰라도 내 영역인 그림에 까지
손을 대는건 반갑고 고맙긴해도 관람객 수준이 아니라 침략자나 점령자 행세를
하여서 때로 고까운 것도 사실이다.
나와 살을 맞대는 연인 관계가 아니었다면 이런 연고로하여 좀 토라질 일들도 적지
않았지만 자기 연인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 표명이라고 여겨서 고깝게 생각하지 않고
고마운 마음만 갖기로 한지도 오래 되었다.
하여간 그는 대학에서는 거의 정년에 가깝지만 한국 과학 한림원에서는 아직도
신입생이자 초년병으로 어른들 심부름을 하느라 심신이 피곤할 때가 많다고 한다.
그와 나는 지난 육개월간 멀리 떨어져 있었다.
물리학을 한 사람이 갑자기 새로 생긴 "한국 과학 윤리 위원회"의 책임을 맡더니
미국 동부의 무슨 연구기관으로 우리 정부의 촉탁을 받아가서 연구와 토론 과정을
한 학기 수료하였다.
또 수료에 임해서는 정부로부터 "국제 생명 과학 윤리 위원회" 한국 대표로 임명이
되기도 하였다.
생명과학 분야가 시끄러워진 세태를 고스란히 감당해야할 처지가 되었으니
그가 일 복이 터진 사람인건 확실하다.
근무하는 대학에는 정부 기관 파견으로 처리되어서 연구 교수의 직함을 유지
하였다.
"참 당신 대단하세요"라고 내가 덕담은 하면서도 "학생들은 언제 가르치느냐"고,
놀린적도 있는데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힐난이기도 하였다.
물론 그는 교수의 직분이 "티칭", "리서치", "서비스"라는 전가의 보도로 방벽을
쳤지만---.
퍄견기간 동안에도 그는 뉴욕의 현대 미술관(MoMA)에서의 세잔느 특별전 도록을
장만하여 보내주는가 하면,
개관 상태에서 리모델링을 하고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작업 과정을 설치미술을
스케치하듯 자료화하여 나에게 보내 주기도 하였다.
하여간 그런 내 연인이 돌아왔다.
그를 맞기 위하여 나는 며칠 전부터 피부 관리 클리닉에서 집중 관리를 받았고
헤어 숍에서는 미리 예약을 해둔 최고 디자이너가 보조 디자이너와 중상 둘,
그리고 스텝 셋을 데리고 설계한 특별 기획 헤어모드로 내 머리, 아니 내 얼굴
전체를 단장 하였다.
화랑계에서 잘 나가는 내가 최근에 찍어낸 판화 여러개의 판매 값이 고스란히 들어간
난리를 피우며 이십년 연상의 내 연인을 오랜만에 맞을 준비를 한것이다.
전신 마사지도 필수 코스로 넣었다.
물론 이 정도로 들어간 돈은 나중에 말하려고 하는 나의 몸에 대한 지출과 비교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표현이 좀 뭣하지만 조족지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북동의 내 아버지는 부자이지만 눈에 난 딸인 나는 불황을 타고 있는 화랑가의
그저 중견 작가일 따름이었다.
나의 전공인 유화나 채색 판화의 화풍은 지극히 서구적이었으나 내 얼굴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시대의 미적 기준과는 달리 좋게 말하여서 보름달, 막 말로는
떡판 같아서 평생의 한으로 남을 판이었다.
성형 수술이라는 극단의 처방이 있었지만 그 동안은 부작용이 무서워서, 또 내 연인과
사랑하기에 바빠서 용기를 내지 못하였는데 중년을 훌쩍 넘기면서 내 연인의 부재
기간을 천재 일우의 기회로 하여 나는 마침내 그 한을 풀어버라게 된 것이다.
알고보니 세상이 변하여도 그 사이에 너무 심하게 진도가 나갔다.
이론적으로는 아니 실제적으로도 마음만 먹으면 내 달덩이 같은 얼굴을 한주먹도
안되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같이 만들 수도 있다는게 아닌가.
나는 주먹밥 보다는 조금 크게, 낮에 나온 반달 정도로 만족하는 공사를 했는데
시공은 성공적이었지만 최종 준공검사는 이제 공항에서 내 연인으로 부터 받을
판이었다.
그가 나를 알아본다면 부실 공사, 그간의 노력은 수포인 셈이었다.
입국장에서 내 가슴은 조마조마했으나 과연 내 연인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나는 기쁘게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가 뜨거운 포옹을 하였다.
아, 키스도 물론 하였다.
순간 속에든 혓바닥은 열락의 지경에서도 상관이 없었으나 겉 가죽인 입술과
그 순치 시스템 일체, 그러니까 잇몸과 치아는 다소 과민 반응을 보였는데
이윽고 원상 회복에는 문제가 없었다.
어쨌거나 준공 검사관인 그는 정말로 처음에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사전에 여러차례 전화와 e-mail로 경과를 이야기한 바도 있고하여서 마침내
놀라움과 환희 가운데 나를 그의 품으로 꼭 껴안아 주었다.
다만 그는 나이에 걸맞게도 "얼굴 크기가 부르짓 바르도만하네"라고 하여서 나를
약간 실망시켰지만---.
부르짓 바르도라면 언제적 사람인가, 더우기 개고기 발언 파문으로 우리 민족의
공적이 아니던가.
우리나라 곻항 풍속도도 많이 달라져서 껴안고 입술을 부비는 우리의 행동을
크게 의식하는 사람은 없는듯하였다.
글쎄, 우리의 등 뒤에서 플래쉬가 터지는듯도 하였으나 우리가 피사체일리는
없었다.
그의 귀국은 조용히 이루어졌고 언론 같은 데에 일부러 흘리지도 않았었다.
하여간 이제 내 얼굴의 성형 수술은 대만족 상태임이 판명되었는데 그러고 보니
몸 관리에 대한 아쉬움이 불현듯 마음을 사로잡았다.
물론 노력은 하였다.
그러나 얼굴 시공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아무래도 최선을 다하지는
못하였다.
기술 수준도 아직 미흡하였다.
우선 유방 처리는 그래도 워낙 발달한 라텍스 소재로 그럭저럭 넘어갔으나
지방이 급속히 빠져나간 허벅지와 긴 다리가 이제는 말라깽이 젓가락이 되어서
탄력을 잃기 시작한 내 엉덩이를 겨우 받치고 있는건 비극적 사태일 따름이었다.
팬티를 입기 보다는 두겹 거들로 보정을 하여 히프와 다리 부분을 최종 마무리
했으나 아무래도 탄식을 금할 수는 없었다.
내가 천경자 기획 전시회가 열리는 삼청동의 현대화랑 쪽으로 포르셰 컨버터블을
몰아부치자 그는 처음에 좀 낭패스러워했다.
"피곤하기도 하고, 당신과 샤워 부터 먼저 하고 싶었는데---."
"그래도 천경자 전을 보고나서 밖에서 식사도하고 들어가 쉬어요. 오늘이 그 전시회
마지막 날이거든요."
"그렇더라도 꼭 보아야 되나. 전에도 몇차례 보았는데---."
"그런데도 생각나는게 없으세요?"
"아차, 그래 그 엉덩이! 제목이 '누가 울어'였어! 종이에 채색화, 당신 엉덩이를
빼다박았다고 볼 때 마다 내가 찬탄했지, 하하하. 당장 가봐야겠네."
그가 드디어 감을 잡았다.
몹씨도 가는 내 허리선 아래에서 나의 자랑스럽게 큰 살찐 엉덩이는 쳐지지 않고 위로
올라붙어서 천 화백이 그린 그 누드 채색화의 엉덩이와 그렇게 닮을 수가 없다고
내 연인은 항상 찬사를 보낸 바 있었다.
아, 물론 그림이 아니고 내 엉덩이에 말이다.
내 허리선이야 천 화백의 "누가 울어"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고---.
나는 차를 집이 있는 일산 쪽이 아니라 시내 방향으로 하여 액세레터를 밟았다.
"그 사이 차도 외제, 그것도 포르셰 컨버터블로 바꾸었네?"
비가 조금 내리면서 캔버스 천으로 덮은 차의 지붕에서 후두둑 빗방울 소리가
기분좋게 들렸다.
"당신 허락 받고 젊은 여자가 되었으니 소품들도 다 바꾸어야지요."
내가 콧소리를 내면서 그를 흘겨보았다.
"그래 그래, 하지만 나도 마음은 젊은이라오. 무시하지 마시오. 다만 내가 따로
소품들을 선물하지 못하여서 그게 마음에 걸리는구만.."
그는 항상 나에게 경제적으로는 보탬이 되지 못함을 미안해했다.
포르셰는 나르듯이 강변도로를 달려서 마포 구청, 모래내 고가 차도, 연대 앞,
이대 후문, 금화 터널, 사직 터널, 그리고 중앙청 앞을 지나 삼청동으로 들어섰다.
현대 갤러리는 항상 기획력이 좋아서 관객이 만원이었고 주차장도 평일 낮인데
꽉찼다.
나는 옆에 붙은 화랑 레스토랑, "두가헌"으로 가서 차를 세웠다.
천경자 전,
개막 전날 저녁의 오프닝 행사 때에는 의례 그랬듯이 나도 초대를 받았으나
성형 수술이 끝나고도 장기적으로는 6개월 간의 금족령을 받은 상태라서 올 수가
없었다.
아니 의학적 금족령이 그러했다는 것이지 다소간의 나들이는 가능했으나 나는
새 얼굴을 며칠 후면 나타날 내 연인에게 최초로 공개하고 싶었었다.
이제 그런 나의 소망과 고집대로 마침내 나는 내 연인과 천경자 전의 전시 종료일에
이 곳을 찾게 되었으니 감회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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