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마련한 터전이 바로 명문인 H대학 인근의 사근동, 지금의 분식점 가게였다.
그때만 해도 벌판이던 왕십리 사근동의 철도 부지와 서울 시 채비지가 얽히고
섥힌 이 땅으로 청계천 철거민들이 몰려와서 말뚝을 박을 때 나도 한 주먹하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때 이래로 이 땅 위에는 맨날 철거와 복구가 숨바꼭질을 하다가 88년도 올림픽 때에
H 대학에 실내 경기장이 생기면서 시가지 정비 현실화 계획의 덕을 보았다.
하꼬방을 헐고 길을 넓히되 그때까지 살던 사람들에게 땅을 불하해주고 집을 번듯하게
고쳐짓게했다.
나는 길가로 나있는 집을 완력으로 확보하고 마침내 H대학 출신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한데 분식점"이라는 작은 음식점을 냈다.
지금은 도심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왕십리 H대 부근은 사대문 바깥에서도 한참 먼
문자 그대로의 "한 데"여서 이름이 "한데 분식점"이었다.
정식 행정 동명 "사근동"은 한 동안 "삭은 동"이라는 탄식으로 이 곳 사람들 끼리는
유행했으나 지금은 무어라더라, 그래 쌍전벽해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사금동", 그러니까 금싸라기 땅이라고 이 곳을 부른다.
"한데 분식"은 386세대가 한참 학생 운동을 할때 장사가 가장 잘 되엇다.
낮이고 밤이고 데모하는 학생들은 캠퍼스와 인근 꼬방 동네를 숨바꼭질하면서
우리 분식집에서 라면으로 세끼를 해결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아내 순분이의 요리 솜씨는 왕십리 제일이었다.
저녁의 시원한 술국은 천하제일이었다.
대학생 데모대들이 때로 흥분하여 우리 분식점에 와서까지 격앙된 분위기로 군사정권을
성토하며 술에 취하여 때로 기물을 부수려고 할 때에 내가 나서서 주먹으로 다투면
큰 싸움이 될뻔한 경우에도 아내 순분이 나서서 타이르면 학생들은 거짓말 처럼
얌전해졌다.
내가 아내에게 꼼짝 못하는 내력에는 이런 역사가 쌓여있다.
가끔 고아원 원우회 친구들이 찾아와서 턱없는 돈을 요구할 때에는 내 주먹 힘이
실력을 발휘하여 내쫓곤 했지만 팔팔한 학생들을 다룰 때에는 순분이의 따뜻한 마음
밖에 치료약이 없었다.
아니 원우회원들에게도 아내가 나 몰래 얼마씩 보탬을 주는 것 같았으나 그런 것까지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닌듯, 모른체 살아왔다.
하지만 고아원 출신들과 나와의 공식적 관계는 점차 끊어졌다.
천사의 집은 그 후에 남한산성 자락의 마천동인가로 옮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혀
소식을 모른다.
"여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아, 아니야. 광식이 녀석 내외가 손주나 뽑았으면---."
"기다리세요. 다 때가 있겠지요."
"그래, 다 때가 있지. 우리가 이렇게 좋은 아파트에서 살게 된 것도 다 기다린 탓이지.
당신 덕분에 내 성질도 다 죽었어, 하하하."
"한 데 분식"이 있던 곳은 작년 부터 강북 부도심 개발 열풍이 불면서 또한차례
집값이 폭등하였다.
우라는 가게 뒤에 있는 집은 땅값으로 팔고 가게는 세를 준다음 광교산 자락의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했다.
그리고도 돈이 좀 남아서 은행 융자를 끼고 수색에 있는 고속철도 조차장 근처에
아들 집도 하나 장만해 주었다.
정년 퇴직이니 명예퇴직이니 하는 말이 그렇게 부럽던 차에 우리도 일단 퇴직을 한
셈이었다.
우리 가게 뒤의 그 형편없는 집을 그렇게 비싸게 산, 외제차를 타고 온 부인이
제 정신인지 아닌지를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꿈에도 그리던 아파트로 이사를 왔고 그 첫날 새벽은 부엉이
소동으로 그렇게 지나갔다.
이사 둘쨋날은 닭 울름 소리와함께 시작되었다.
첫날은 부엉이 소리에 묻혀서 모르고 그냥 넘어갔던 닭울음 소리가 다음날
새벽에 내 귓전을 때렸다.
"꼬끼요, 꼬오~"
나는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소리야? 천사의 집에서 듣고는 처음이네."
내가 아내의 입에서도 못 나오게하던 '천사의 집' 소리를 정말 오랜만에 먼저 해버린
것이다.
'천사의 집'에는 양계장이 있었다.
'자급자족'이라는 팻말이 그 양계장 망창 위에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 팻말이 양계장 보다 더 크다고 아이들에게 말하며 돌을 던져 맞추는
내기를 한 적도 있다.
그 팻말은 아무래도 전시용같았고 가끔 오는 지체 높은 손님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우스웠다.
자급자족이라는 팻말의 뜻과는 달리 달걀 구경은 원생들에게 그림의 떡이었지만
아침마다 길게 뽑는 장닭의 "꼬끼요, 꼬오~" 소리는 내 가슴을 시원하게 했다.
나도 세상에 저렇게 큰 소리를 지르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저 장닭처럼 "순분이"라는 암탉을 내 날개 아래 놓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가득하였기 때문에 양계장의 그 지독히 역겨운 계분 냄새도 견딜만
했던 것 같다.
내가 새벽에 튀어일어나다시피 하면서 우리사이에는 금기로 되어있는
'천사의 집' 소리까지 부르짖은 데에는 그런 사연이 있었다.
"여보! 어디 산자락에 양계장이 있나보네. 우리도 심심한데 이 참에 양계장이나
하나 차릴까. 늙어서 그런가 천사의 집 생각이 나네."
"아이구, 그런 말씀 꺼내지도 마세요. 이 비싼 땅에 양계장이라니요, 꿈도 못
꾸지요. 그리고 천사의 집 이야기는 왜 꺼내시오? 아예 입 밖에도 내지 말아요."
순분이 새벽부터 목소리를 높였다.
좀체 그러지 않던 사람이 양계장 때문인지 고아원 때문인지 예사롭지가 않았다.
순분이는 그 당시 모든 원생들이 좋아하였다.
마음이 곱고 여린 순분이는 또 비슷한 성품의 남자 아이들을 나보다는 더 좋아
하였다.
그걸 내가 우격다짐으로 누르고 그녀를 차지하다시피 한 것이었다.
내 사람이 된 이래 순분이가 한번도 다른 아이들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내가 주먹을 좀 쓰니까 사근동에서 몸을 파는 계집아이들이 가끔 추파를 던졌고
내가 그 중에서 한 두명을 건드리며 사고를 쳤어도 그녀는 아무 말을 하지않았다.
그런 시기의 새벽에 가끔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은 적은 있었는데, 그 깊은 한숨
몇번에 나는 손을 씻고 돌아와 가게 일과 집안 일에만 충실하였다.
순분이의 한숨 소리를 들으면 나는 왠일인지 오금이 저렸다.
그리고 천사의 집에서 겪었던 저 겨울의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가 느껴졌다.
"저 장닭은 암탉을 몇 마리나 거느릴까?"
내가 농담처럼 물었다.
"좋아하지 마세요. 장닭 한마리 뿐입디다. 암탉은 없어요. 가까이에 있는
유치원에서 교육용으로 모양 좋은 장닭을 한마리 기른데요."
"원생들이 좋아하겠네."
"아이구, 그 원생이란 말씀도 그만 두세요. 그 말만 들어도 가슴이 저려요.
닭똥 냄새가 나요."
아내가 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고아원에 있을 때에 그 원생이란 소리를 귀가 아프게 들었다.
고아원을 나온 이래 그 말은 쓸일도 별로 없었지만 결코 쓰지도 않았다.
그래도 이 날 새벽 아내의 반응은 너무나 강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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