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문화의 파편들

"땅 물 빛 바람"의 정년 잔치

원평재 2006. 5. 31.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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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퇴임식"이라는 고귀한 전통이 민폐로 인식되면서 사라져가고 있는 세태를

역행하여 어떤 선배께서 그 행사를 도모한다기에 내가 처음에는 말리려고 하였는데,

내용을 듣고 보니 그런게 아니었다.

참 신선하고 기발하고 수긍이 가는 방식이었다.

 

먼저 퇴임하는 자신과의 지난 교유를 회억하면서 노익장을 기원하는 덕담과

노년의 의미있는 삶의 비전을 그려주는 옥고를 청탁하여서,

글을 보내주는 분들만 날을 잡아 초청하여 아무 부담없이 음식을 나누고

헤어질 때에는 그렇게 해서 모인 원고로 꾸민 책자를 무료로 증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정녕, 정년이라는 그 시점은 얼마나 혹독하고 폭력적인 "날자변경선"일

것인가.

사실 손금만한 표지도 없는 그 무심하게 획정된 날을 또 그냥 무심하게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진정 범속하지가 않으리---.

범속한 나는 그 날짜 변경선을 때가 되어 넘게되면 어떤 사회 복지 재단 같은데에

이름 석자 넣기를 갈망하며 마음을 달랜다.

 

그건 그렇고 그 선배의 정년 잔치 계획은 범속한 사람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하였다.

나는 "이런 참!"하는 감탄과 함께 그 선배의 큰 그릇됨에 다시 찬사를 보내고

정년잔치에 대한 내 좁은 소견과 고정관념을 책하면서 마치 무슨 큰 보석광산을

선점 당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허둥지둥 졸문을 초하여 "이 메일"로 마감일에 당도하여서야 한 꼭지를 겨우

보내 드렸다.

 

지리학이 전공인 이 분은 이런 학문적 바탕으로 "땅과 물"에 대하여 강단에

오래 섰는데, 하지만 여느 강단 학자들과는 다른 길을 폭넓게 모색해 왔었다.

우선 그는 수맥을 기가 막히게 잘 찾아내었다.

가령 가뭄이 들었을 때 양수기를 대고 가장 쉽게 물을 끌어 올릴 곳,

수도가 없는 시골에서 음용할 식수를 찾는 일,

등등에 "버들가지 방식"과 기타 "탄성파 방식" 등을  이용하여 귀신 같은 재주로

물을 찾아 쏟아내었다.

 

공익과 학문적 실천을 위하여 시작한 이 일은 마침내 "광천수" 개발로 이어졌고

무슨 맥주 회사의 심층수 개발에도 기여하여 지금도 인기가 있는 "H 맥주"의 초기

광고로도 많이 얼굴이 팔렸다.

은발의 노신사가 펑펑 솟아 올라오는 물줄기를 뒤로하고 웃는 모습인데

"노신사와 힘센 물줄기"라는 기막힌 상상력이 시중에 파다하면서 하여간 맥주는

불티가 났다.

지하 심층수 H맥주는 그때 이래로 흔히 "히테" 라고 즐거운 오독이 되기도 한다.

 

일본 대학의 총장이 참석하고 멀리 나이지리아의 수도 라고스에서 인터넷 사업을

크게 하는 장남과 카나다에 있는 차남, 한국에 있는 셋째, 네째가 참석한 풍성한

정년 만찬을 잠시 아래에 영상으로 그려보면서,

 "땅 물 빛 바람"이라는 제목으로 엮은 정년 기념 책자에 내가 얼른 만들어 올린

졸문까지 사족으로 붙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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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리얼리스트

 

계절의 여왕 오월의 어느날, 퇴근 길 내 승용차 옆으로 날렵한 BMW가 지나갔다.

힐끗보니 머릿결은 평소 익숙한 은발이 아니라 염색끼가 있는 그레이 색갈이

감돌았지만 얼굴은 너무나 친숙한 바로 그, 최 교수님이 아닌가.

지난 1년간 내가 안식년으로 중국과 미국으로 나가 있는 사이에 최 교수께서는

정년을 하셨다.

그리고 귀국 후에도 나는 안식년 1년의 공백을 뒤치다꺼리 하느라 바빴고,

최교수님이야 항상 바쁘시니 서로 연락이 닿지 않다가 이렇게 차도에서 조우를

하다니---.

 

내가 경적을 울렸더니 얼른 알아보고 내 앞으로 차를 빼어서 길가에 차를 세우신다.

나도 얼떨결에 뒤쫓아가 섰다.

건강한 풍채에 항상 동안을 유지하는 최교수께서 힘찬 악수를 청하신다.

그 분의 잘 알려진 세찬 악력으로 내 손이 진정 아플 지경이다.

 

"이런 세상에! 연락이 그렇게도 안되어요?"

"물 박사님이 더 바쁘시더군요."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졌다.

"늦었지만 글 하나 쓰시오. 그래야 내가 초청하는 잔치에 참석할 자격이

생기는거요."

 

이 양반은 자신의 "정년 기념 잔치"를 이렇게 베푸는 것이었다.

내가 오래 알고 마음을 주어 교유했던 최교수님의 면모가 다시한번 확인되는

한 마당이 이렇게 낭만적으로 기획되어 나가는 모양이었다.

길거리에서 그는 가방 속의 유인물을 꺼내어 출판할 책의 성격과 제목과

참여자들의 집필 방향을 세심하게 설명하신다.

낭만과 실제가 적절히 안배된 최교수님의 성정이 선연하게 표출되는

오월 어느날의 기분좋은 퍼포먼스였다.

 

 

 

    (유명하다는 풍각쟁이도 이날 찬조 출연하여서 한 낭만을 띄었다.)

 

저 은발의 트레이드 마크는 어디가고 그 사이 머리에 염색을 좀 하셨나,

그레이 색갈이 감도는 머릿결은 로맨스 그레이를 꿈꾸는 흔적인가.

하긴 "성취는 항상 꿈꾸는 자의 것"이라고 했거늘---.

이 분의 시도는 항상 신선하고 창의적이고 경이적이어서 사람의 허를 찌르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는데, 정년을 하신 요즈음에 도모하는 꿈은 무엇인지

범부인 내가 아직은 촌탁할 계제가 아닌 것같다.

 

그는 늘상 정년을 하고나면 어떤 비행 물체를 개발하겠다고 소년과 같은 꿈을

이야기 했는데 그것이 비록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커러스의 비상"과 같은

추락의 꿈이라 할지라도 이 분이 손을 대면 무언가 인간 세상에 유익한 결말

하나쯤은 창출되고야 말 것이다.

그것이 물상적이든 정신적이든 어쨌든 그 결말은 주목거리이리라.

 

 

 

내가 최교수님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해 온 인연은 구체적으로는 ROTC에서

비롯되었다.

이 분은 기수로 따져서 나의 여러해 선배가 되지만, 오래 전에 우리가 있는 기관의 

ROTC 조직을 도모하자는 준비 모임에서 의기 투합하였다.

회장까지 역임하면서 ROTC 모임에서의 이 분의 활동과 에피소드는

다른 분들의 술회가 따로 또 있을듯하여 그냥 지나치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이 분이

참석하지 못하고 진행되었던 모임은 항상 그만큼 에너지가 빠진 분위기였었다.

 

나는 이분과 특별히 땅 구경을 많이하였다.

이 분의 전공이 지리학이라서도 그러하겠지만 지리학도 세분하면 인문 지리,

자연 지리 등등이 있겠지만 이 분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듯 하였다.

풍수에 대한 이 분의 일가견이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닌가한다.

물상적이고 자연적인 지리의 토양에 이 분은 경제학, 사회학, 도시 공학적인

인접, 부가학문을 접목 시킴은 물론 정신적인 영역, 나아가서 영적이고

초월적인 탐색 경로를 항상 설정 하여서 함께하는 이들의 사유의 변경을

넓혀주었다.

 

 

 

나도 이런 탐색의 대열에 곧장 즐겨 참여하였다.

돌이켜보면 이 지맥 탐사의 여정은 부동산 투자의 지침으로도 활용될 수

있었다.

강원도 정선의 카지노 단지, 서해 대교 인근 당진, 송악,

그리고 저 땅끝 마을과 한국 우주 탐사 기지로 선정된 고흥반도---, 등등

그가 미리 점지한 곳은 곧장 부동산 투기가 불붙는 지역이 되었다.

 

하지만 이 양반이나 나는 이런 곳에 땅 투기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고

그 땅에 따르는 시류의 흐름과 그 전말을 확인하고 즐거워하였으니

풍수의 대가를 따라다닌 보람과 기쁨이 이보다 더할 수 있었으랴---.

 

낭만적인 성정에 가득한 분이되 현실을 방기하지 않았고, 현실을 예의

직시하되 근본적으로는 낭만적이며 학문적 고매함을 또한 놓치지 않고

지내온 이 분과의 평생 교유는 즐거움 그 자체였다.

태양을 향하여 비상하는 "이커러스와 디덜러스" 부자의 꿈꾸는 모습에

못지않게 현실 감각으로 평형과 방향을 잘 유지하는 이 분이 이제 새로이

꿈꾸는 변경은 가이없이 우리에게 내비친다.

 

더욱 건강하신 모습으로, 로맨틱 리얼리스트로 우리의 앞장을 서 주십시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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