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문화의 파편들

목우 에스프리

원평재 2006. 6. 24. 14:27
13931

학교 다닐 때에 몸을 담았던 대학 신문사에서 창간 6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 문집을

낸다고 글을 요청하였습니다.

당시 대학 신문의 이름은 "X대 학보"였고 매주 목요일에 나오는 주간 신문이었지요.

학창 시절의 이야기들은 다른 사람들이 많이 쓸 것 같아서 나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의

에피소드에 글의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별 일 아닌 일들을 상기하여 시간을 낸 글이라 조금 줄여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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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 에스프리(木友 Esprit)

                                  
1. “X대 학보사"를 학창시절에 거쳐간 먹물장이들이 공유한 고유한 정신, 에스프리
     같은 것이 존재할까?
2.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3.   아니, “무엇일까?”라고 물을 만한 존재의 이유, 레종 데트르는 있는가?

 

   우리 모두가 한때 몸담아서 가슴 뜨겁게 열정을 불태웠던 “X대 학보”가 창간
60주년, 사람으로 따지면 회갑, 이순(耳順)의 나이를 맞는다고 한다.
그리고 지나온 발자취를 회고하고 앞날의 비전을 담는 기록물을 만들기 위하여
여러분들이 애쓰신다고 한다.
그것도 대학이나 학보사의 도움 없이 순전히 학보사를 거쳐 간 사람들의 노력과
성의와 부담만으로 꾸민다는 것이다.

 

아, 그러면 그렇지, 이런 작업정신이 바로 위에서 던져 보았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명료한 답변에 다름 아니구나.
공연히 복잡하게 머리를 굴렸구나. 이런 다이내믹한 움직임이야말로 바로 세 가지
의문을 뭉뚱그린 하나의 명답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대학을, 혹은 학보사를 졸업한 60년대 후반에 벌써
“목우회”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X대 학보”라는 젊은날의 신전에 바친바 있었다.
당시 모임의 이름을 놓고 한동안 논의가 많았다.
"목우회"라니, 유명한 화가 클럽을 위시하여 너무 흔한 이름 아닐까?
그리고 모교의 이름이 우리 모임에는 꼭 들어가야 하지 않는가?
여러 주장이 강력했고 촌스러우나 "학보사"라는 말을 빼지 말자는 고집도 은근과
끈기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X대”라는 축약어가 더 이상 중앙 무대에서는 설자리가 없다는 현실
논리에 우선 그 다정한 모교의 이름은 밀려났고 모두들 동감하였다.
이어서 “학보사”라는 투박하고 가공되지 않았으되 무섭게 정이 든 어휘를 버리는
아쉬움에 여한들이 많았으나 이제는 장롱에 넣어둔 솜이불처럼 보듬어만 보자고
대견스런 진보주의가 앞장을 섰다.
다 미래를 위한 현실 감각이었다.
  
그런 조탁 과정을 거치면서 세월의 풍상에도 빛바래지 않는 공통의 격정을 담을
문패로 "목우회"는 서서히 등장을 했던 것이다.
지금 그 창안자가 누구인지는 잊었으나 “목우회”라는 세 글자를 조탁하는 데에는
모두 이렇게 끌과 망치를 들고 나섰던 것 같다.
 
우리가 시내의 인쇄소에서 매주 신문을 만들어 실어올 때는 목요일이었다.
활판 조판을 하여 연판을 뜨던 시절이니 전자 조판 시대인 지금과는 사뭇 다른
과정이었다.
하여간 "목요일", 그날이 주간 학보의 발간 일이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그 시절이었으니 어쨌든 경북 인쇄소에서 밤을 새우더라도
주간 신문이 라일락 언덕 위의 학보사 까지 당도하여야만 하는 그 절체절명의
요일이 목요일이었다.

아, 정말 주말 단위의 학보사 생활 중에서도 목요일을 뇌리에 새기며 다니지
않았던 학보사 기자가 어디 감히 있었던가.


마침내 흔한 이름이라는 반론을 물리치며 “목우회”라는 “목요 정신"이
솟대처럼 솟아오른 데에는 이런 공통분모가 우리 흘러간 먹물들의 가슴을 쳤기
때문이었다.

이런 저런 일들을 돌이켜보니 과연 "X대학보사 정신"은 결국 “목요 정신”,
"목요 에스프리“로 우리의 가슴에 면면히 지속되어온 현상학이자 본질이었나
보다.

 

(중략)

 

많은 인재들이 속속 라일락 언덕 위, 학생회관 건물의 학보사로 집결하였다.

예컨데 그때에 이미 김춘수 교수님으로부터 등단 추천을 마친 전재수 군이나
배정웅, 양왕용 군이 우리 뒤를 이어 모습을 보였다.


그외에도 기라성같은 문우들이 학보사 문을 두드려 잠시 들어왔거나 결국 들어오지
못하고 문밖에서 글로 승부를 결한 경우도 많았는데 여기 모두 매거하기는어렵다.
지금 당시의 기록물인 학보가 모두 축쇄판으로 나와서 모교에 비치되어있다고 하나
내려가서 확인할 시간이 없어서 그런 부분은 다른 이에게 맡기고 여기에서는
체를 치 듯 하여 떠오르는 상념만을 붙들고자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를 포함하여 일부는 ROTC로 또 일부는 공군이나 해군의 장교로,
또 대부분은 국군 사병으로 병역을 필하고 만고의 글쟁이, 먹물 통들이 경향으로
나누어 지내다가도 발동이 걸리면 다시 고향 도시로 모였다.
신문사로, 대학원으로, 학교로 직업을 잡은 이들이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정서가 바로 저 "목우 에스프리"였던가 보다.


그것은 사철을 가리지 않고 봄이면 흐드러진 꽃 잎 앞에 너울너울 춤을 추던
금달래 같은 광녀의 타는 시선으로, 또 여름 한 철이면 분지인 고향의 더위를 싹
씻어내는 소나기의 정열로, 가을이면 팔공산의 시뻘건 단풍의 정기로, 또
겨울날이면 중앙통의 느닷없는 폭설이나 앞산 계곡의 발이 빠지는 적설 같은
위력으로 우리를 함께 붙들어 매었다.

 

어느해 여름이던가, P는 지방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더니 일본 유학을
간다며 돈을 잔뜩 싸가지고 고향에 나타났다.
아마도 2박 3일의 통음으로 점철된 "목우장이들"의 굿판은 마침내 3일이 지난 후,

교외 유원지의 모래밭에서 막을 내렸고 돈을 모래밭에 다 뿌린 P는 꿈을 접고
다시 향리로 내려간 이래 소식이 없다.

 

때로 이 청춘열전은 서울에서도 벌어졌으니 작고한 K의 신혼 댁에서도 
여럿이 모두 통금을 어기며 밤을 새웠던 적도 있었고 무교동 낙지집 순례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나이들이 들어가며 목우회는 잠시 소강상태를 지속하다가 구성원 모두의
내부적인 숙성과정을 거친 다음, 한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다시 중흥되고
속행이 되었다.

(중략)

 

주위의 큰 기대와 여망을 모았던 대한민국 최고의 편집 대기자, K는
조선일보에서 당시 언론 파동을 겪던 동아일보 편집국으로 옮긴 일을 자괴하며
지내더니 어느날 초저녁, 가판을 내고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여
그 큰 뜻과 재능이 부러지고 만다.
그 슬픔과 통한을 여기에서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조선일보에 있다가 해직이 되자 "청람 출판사"를 시작하여 기염을 토하던 후배,
C도 병마의 희생이 되니 역시 안타깝기 그지없을 따름이다.

 

총명과 패기의 대명사, L 후배는 일찌기 "월간 세대" 등 여러 출판 기획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다가 조선일보 출판국의 주요 보직을 거친 후, 마침내는
국회 공보관이라는 막중한 자리를 맡아서 "국회보"의 발간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언론 발전과 창달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중략)

 

이야기의 끝을 장식하여야겠다.
3년 전이던가, 대구에서 L 인형과 Y 국장 등이 우리 학보사의 진정한
초석을 닦으신 김윤환 선배가 와병중이시니 문병을 하자고 연락이 왔다.
김 선배님은 방배동 자택에서 중병을 가료중이어서 일행은 댁으로 향하였다.

병석에 누워계시던 중환의 노정객, 허주 선배께서는 의식의 가닥을 겨우
잡으시는가,

후배들을 반기시면서 한번 또렷이 웃으셨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고 하셨다.


비서실장이 침대 위로 훌쩍 뛰어올라서도 잘 듣지 못하는 말씀을 내가 입술의
모양으로 유추해 내었다.

“지금 몇시고?”
그런 말씀이었다.

때는 저녁시간, 황혼이었다.
나는 그분의 실제인 김태환 의원과 ROTC 동기라는 연고로 가끔 만날 기회가
있어서 그때, 그 저녁시간, 황혼의 일화를 전하기도 하였다.

 

“과연 지금이 몇 시인가---.”
X대학보는 이제 창간 60주년을 맞는다.
사람으로 치면 황혼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강(長江)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고 나아가듯이” 이제 수많은
목우인들을 세세년년 불러들이고 또 내보내며 거목으로 성장한 “X대학보”여!
항상 저 아침의 기개, 정오의 직관, 황혼의 오성을 잊지말며 더욱 큰 나무로
커나가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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