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 기원탑에는 이제 아쉬움과 반성과 2010년의 승리를 향한 각오를 다짐하는 문구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천수가 그라운드를 치고 우는 모습이 한겨례의 가슴을 적셨다.
16강 진출의 기회를 그렇게 억울하게 놓쳤지만 새벽에 귀가를 서두른 붉은 악마들의 일상은
해와 달의 운행이 어김없듯이 일과에 맞추어 진행이 되었고,
주말에는 다시 보통 사람들의 결혼식이 봇물 터지듯 하였다.
나도 빠질 수 없는 혼례를 좇아 주말 결혼식장을 순례하는 가운데에서,
광화문을 거칠 기회가 있었다.
붉은 악마들이 포효했던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 태극 전사들은 그곳에서 2010년을 기약하며 꿈을 그려내는 모습으로 여전히
건재하였고 다음을 기약하고 격려하는 기원문들도 초여름 더위를 마다않고 펄럭이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제패의 염원을 담아서 소리지르고 짝짝이를 두드리고 사물패에 장단을 맞추던
인적들은 어디로 사라지고 텅빈 광장,
내 가슴도 텅 비었다.
한때 불티나던 붉은 티 셔츠도 이제 찾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 여름 뉴욕 가는 길에 기념품으로 선물을 할까---,
광화문 지하철 역에서 정품의 값을 물어보니 만원과 5000원---.
종로 바닥에서는 4000원이라는 것을 3개에 만원을 주고 샀다.
발길 따라 약속 따라 종로 거리를 걷는데 미국과의 현안이 되어있는 어떤 문제를 반대하는
행렬이 있어서 조금 길이 붑볐다.
역사의 봇물은 이미 다른 도랑을 내고 흘러가고 있었다.
인적이 없는 것 보다는 다행이다 싶었다.
이윽고 인사동을 들리니 더욱 위로가 되었다.
광장의 허허로움 대신에 사람 냄새가 물씬하였다.
여기에도 티 셔츠를 팔아서 물어보니 하나에 3000원이라고 한다.
아까 종로에서 값을 깎았기 망정이지 바보가 될번했다.
눈 감으면 코베가는 종로 바닥이었구나.
인사동 인심을 감사하며 9000원에 다시 붉은 T셔츠 세개를 사고 정품 만원짜리도 하나 샀다.
그랬더니 덤으로 무슨 응원 깃발과 손수건 같은 것도 끼워준다.
흥정과 구입으로 정신이 없는데 "게 물렀거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포졸들과 순라꾼들이 전통의 거리에서 또 눈길을 끄는 행렬을 만들었다.
이틀이 지난 평일에 다시 인사동을 찾았다.
지인들과 16강 진출의 패배를 울분으로 논하고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
내가 잠시 서울을 비운다고 며칠 전에 지인들에게 알렸더니 전별 주석으로 마련된 자리였다.
나중에 서로 저녁 값 지불을 하려다가 나는 돈도 못꺼내고 투박한 지갑을 뒷주머니에
소홀히 되 넣었나---.
아니 종로 바닥의 소매치기에게 당한게 틀림없나보다---.
집에와서 보니 뒷 주머니의 지갑이 없어졌다.
밤새 은행과 백화점의 카드를 막고 부산을 떨었다.
다음 날 새벽부터는 전날 다녔던 여러 곳과 인사동의 그집으로 분실물 찾기 순례를
하였다.
아무 곳에도 잃어버린 물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발 품을 팔아보았자 허사였고 발바닥만 아팠다.
나이 탓인가, 금년에는 왜 이리 잃어버리는 것도 많은지---.
아침이 눈뜨는 모습을 카메라에 포착하였으니 분실의 저녁을 다소 보상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 생활 구조에서 지갑 같은 것을 잃어버리면 참으로 뒷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다.
그 번거로움은 가히 히스테리를 일으킬 지경이다.
16강 좌절 이후의 일종의 패닉 현상을 극복하자는 글을 쓰려고 텅빈 광화문
네거리의 정경을 카메라에 담았던 지난 주간의 내 행적은 끝 물에 가서 결국
내가 패닉 상태를 당하고 만 꼴이 되었다.
6월 말에서 8월 중순까지 우리나라를 잠시 떠나있게 된 이탈감도 여기에
보태어졌나보다.
갑자기 인사동을 연인으로 부여잡고 싶어졌다.
의인화하여---.
영국의 신고전주의 시인에 속하는 "존 단"의 싯귀가 정확하지는 않은채로 떠오른다.
"전별, 슬픔을 금하며---"라는 시에서 그는 사랑의 행위를 콤파스 운동에 빗대고
연인들의 전별은 그 콤파스를 벌이는 일로 풀이하였다.
"연인이여,짧은 전별을 슬퍼하지 말라.
내가 도버를 건너서 대륙으로 잠시 출장을 떠나는 일은 우리의 콤파스를 벌이는
일에 다름아니다.
당신은 굳건히 영국에 서있고 나는 멀리 대륙으로 가니까 우리의 다리를 쫙 벌려서
원을 그리는 것이다.
내가 멀리 가면 갈수록 우리의 사랑의 궤적은 넓고 길도다---."
대충 이런 싯귀였던걸로 기억이 된다.
존단은 원래 젊은 시절에는 남녀간의 사랑의 성시(性詩)를 많이 썼고
사제의 직분에 올라 캔터베리 대 주교가 된 연후에는 영혼 구제의 성시(聖詩)로
자신의 생애를 마무리하였다.
그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는 지금도 곧잘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분실물 찾을 일은 아침 나절이 지나갈 즈음 아예 포기하고
나는 한가로이 내 심금의 현을 몇 줄 뜯으며 존 단의 행적을 회억해 보았다.
인사동을 막 벗어나고 있는데 노랑머리의 서양 아가씨가 우리식 짧은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들고 밥집 앞 청소를 하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을 떠나 만리타량에 와서 하루의 시작을 청소로 열고 있었다.
인사동 입구의 광장에서 노숙자들이 아침 시간에 고물 TV로 뉴스를 시청하던 장면도
교차하였다.
엄숙한 생존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오늘, 6월 말일부터 8월 중순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닙니다.
한동안 이 곳에 들리지 못하겠습니다.
리포터의 역할이 있기에 현지에서도 가능하면 글과 영상을 올리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이번 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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