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을 건너 진주 시가지로 들어서며 오른쪽 차창을 내다보았다.
새로 개발되며 뜨는 지역이라고 한다.
진주성 안에 위치한 "김시민" 장군의 동상 앞에서 진주 문화 예술 재단
"장일영" 부 이사장이 임진왜란 때에 장군과 군졸과 백성들이 한마음이 되어
왜적으로부터 대첩을 거둔 전말을 사자후로 설명해 주었다.
일본에서는 첫번째 진주 성 싸움을 자신들의 유일한 패전으로 여긴다고 한다.
종내는 우리 쪽의 비극이었다.
수주 변영로의 시에 나오는 "강낭콩처럼 푸른 그 물결"은 이제 아니었으나
황포 돛대가 떠있는 무심한 물결 위에 놀이 배들이 한가로웠다.
바쁜 중에도 영접해 준 진주 국제대학교 허남오 총장님의 환대에 감사하였다.
이 곳이 한국 페미니즘의 발원지라는 주장은 의당하였다.
의기 논개가 적장을 안고 남강으로 투신한 그 의혈 행적도 거룩한 순국
이었지만,
그 보다 후일 기녀의 사당을 지을 때 일어났던 유림들의 반대를
마침내 물리치고 여기 남강을 내려다보는 진주성의 명당에 이 집을
우뚝세운 그 전말이 있어서 이곳은 한국 페미니즘의 본산이라 할만 하였다.
그래 그런가, 진주 출신의 여류가 많음은 공지의 사실이 아니던가.
논개는 이 곳 출신이 아니다.
몇군데에서 그 출생 연고를 주장하고 있다한다.
어쨌든 의기 논개는 강낭콩 보다 더 푸른 이 곳 물결 위에서 순국하였다.
위 현판에 각자된 산홍(山紅)은 일제 강점기 전후의 진주 기생으로
그 기예와 자태가 빼어났다.
어느 때던가 을사 오적 중의 하나가 이 곳에서 그 미색을 탐하려하자 분연히
그의 매국 행위를 탄핵하고 자결하였다고 한다.
현판의 4행 한시는 그녀가 생전에 논개의 의로움을 기린 송시라고 한다.
"양귀비 꽃 보다 더 붉은 그 마음"이 흐른 이 바위를 "의암"이라고 부른다.
진주라 천리길이라고 하였지만 이제는 고속도로가 사통오달로 뚫려서
서울에서 지척간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득 강물 위의 그림자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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