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소하 문학상 후기 (4)

원평재 2007. 1. 7. 20:44

21105

 

 

시상식이 있던 날은 절기로 소한이었다.

그동안 조금 참았다는 듯이, 아니면 시상식에 맞추어 눈꽃 송이를

보낸다는 듯이, 아침나절 부터 서설이 대설주의보의 수준으로

펄펄 날리기 시작하였다.

서 교수는 눈 내리는 날의 정오 시간에 꼭 맞추어서 식장인 호텔의

소연회실을 찾았다.

다른 이유는 없었고 미망인, 혹은 사모님을 뵙기가 민망하여서였다.

 



그에게는 아무래도 그동안의 무심이 죄책감으로 닥아왔다.

일찍 얼굴을 내밀다가 무슨 난처한 지경에 빠지기 보다는 예정 시간에

딱 맞추어서 어물쩡 자리를 잡는게 상책이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정말 시작 시간에 딱 맞추어서 그가 식장에 얼굴을 들이밀고 보니

서른명은 더 될듯싶은 미리 온 하객들이 식장을 채우고 있어서 그는

정말 다행이라고 느끼며 헤드 테이블에  앉아있는 수상자 이지함 교수와

우선 반가운 악수를 나누고 얼른 뒷 쪽의 자리로 가서 몸을 낮추었다.

 

하객들로는 우선 문단에서 나온 안면 있는 남녀 문인 몇분이 헤드 테이블

근처에서 눈에 띄었다.

한국 문인 협회의 새로운 임원들을 우편 투표로 뽑는 행사가 눈 앞에 있어서

그런가, 그의 머리가 잠시 회전했으나 출마를 한 분들은 보이지 않아서

그런 관련은 아니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심사를 맡은 위원 몇분과 나머지는

이지함 교수와 개인적 교유가 있는 사이였다. 

이들을 빼면 아담한 회의장을 메운 하객들은 거의 대부분 소하 선생의

과거 친구들인듯, 모두 백발은 당연했거니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분들도

지 않았다.

수상자 이 교수의 가족들은 나오지 않았다.

늦게 본 아이들이 나올 자리는 아니었고 이름있는 교향악단의 바순

연주자인 부인은 해외이건 지방이건 순회 연주가 많았다.

 

좌석을 채운 원로 하객들 중에는 과거 공중파 방송의 회장을 하던분,

신문사의 사장을 맡아하던 쟁쟁한 CEO들도 보였으나 지금은 흘러간

시대의 흘러간 별들, 유성일 따름이었다.

그들도 한 때는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던 혁명 투사이기도 했으며 마침내

체제 속으로 들어가 용비어천가를 소리 높여 부르기도 한 그 이력들을

암각화처럼, 혹은 화석처럼 사람들의 기억에 새겨 남기고 이제는 이

시대와 고별을 하려고 모인듯 싶었다.

과거 한번도 소하 선생이 캠퍼스에서 그런 교유관계의 내색을 하지

않았던 쟁쟁한 현대사의 인물들이 민속촌의 활인화처럼 갑자기 무더기로

나와 앉아 있는 모습들은 고인의 인품을 다시 깨닫게 하는 또다른 요소에

다름아니었다.

 

만감을 느끼며 서교수는 아까 들어오면서 혹시 마주칠까봐 걱정했던

그 곱게 늙으신 할머니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분은 아직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다행이다 싶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식이 시작될 즈음까지도

모습이 나타나지 않자 궁금증이 걱정으로까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하여간 더이상 주최자를 기다릴 수는 없겠다는 암묵적 동의가 돌았는지

시상식은 월간 문예의 편집국장이 개식사와 경과 보고를 함으로써 시작

되었는데, 문득 아까부터 어떤 중년의 부인이 날렵하게 작은 디지털

캠코더로 식장을 녹화하는 모습이 서 교수의 눈에 이채롭게 들어왔다.

"아차, 저 부인이 사모님이시군. 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적절한 비율로

두루 담고 있는 안면의 또렷한 윤곽선, 그리고 좁으면서도 얕보이지 않는

당당한 어깨 곡선의 추임새---."

두어번 본 기억이 뭐 그리 정확하다고 서 교수는 무릅을 치며 외칠뻔

하였다.

물론 무릅을 치거나 외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기억의 편린과 현상이 가까스로 이중인화에 성공하고나자

서교수는 가장 속물적인 감상을 우선 속 마음으로 터뜨렸다.

"그래, 역시 죽은 사람만 억울한 것이지---."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던 분도 이제 홀로 남아있으면서 무엇을 도모

하겠는가.

소하 문학상이라는 만장을 펄럭이면서, 살아남은 자신은 이제 이 시대

최상급의 미용술을 동원하여서라도 한 20년은 더 젊어진 모습으로 나타나

디지털 캠코더를 작동하고 있구나---.

"그래, 탓할 일은 아니지. 내숭을 떨며 미망인의 기표를 내 세우는 것도

오히려 경박하기만 할거야---.

하여간 놀랍고도 고맙지 않은가. 이 인문학 위기의 시대에 이런 문학상의

자리펴기만도 과연 어디야!"

그는 마침내 어떤 안도와 감사의 감상 속에 젖기 시작하였다.

 

좋은 일에 비용까지 지출하며 군말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듯이 순서는

무겁지 않게 빨리 진행되었고 이어서 작은 연회가 시작되었다.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데 사회자가 참석자들의 소개를 시작하여서

서 교수는 다시한번 찔끔했으나 마침 이름과 직함만 호명하여서

미망인의 주의를 끌지 않고 넘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

하였다.

연회가 시작되고 부터는 미망인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캠코더를 치우고

다소곳이 자신의 접시만 해결하였으며 유명, 무명의 인사들도 모두

시끄러운 소리는 내지않고 주로 밥만 먹고 일어섰다.

정말 그 흔한 건배제의와 건배사 조차 없다니, 소하 선생이 평생 좋아하던

브람스의 저 장중한 교향곡의 세계가 연상되는 분위기였다.

 

서 교수도 식사가 끝나자 얼른 일어섰다.

입구에서는 이 날의 수상자인 이지함 교수와 월간 문화예술의 편집국장,

그리고 미망인이 함께 서서 자리를 뜨는 하객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보내고

있었다.

"아, 서 교수, 미망인께서 처음 뵙는다고 하더군요. 저녁에 몇 분이서 뒷풀이

술 한잔하려고 합니다.

저기 파이낸스 센터 지하에 우리 잘 가는 그 곳에서 여섯시 반에 봅시다.

꼭 나와요."

이지함 교수의 말이었다.

특별히 눈에 뜨이지 않고 빠져나오려던 서교수는 몹씨 당황하였다.

"아, 네-네."

그는 미망인의 얼굴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녀의 인상적인 목선만

겻눈질하며 이교수의 초청에 간신히 답을 하였다.

"처음 보신다고---."

그는 다행함과 섭섭함을 함게 섞어 혼자 중얼거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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