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분의 밀애, 이런 표현의 적확성 여부는 일단 논외로 하구요---,
하여간 두분이 아주 조심을 하셨어도 이런 사실은 일단 세상 밖으로
불거져나왔고 소하 선생과 그 첫 부인께서는 결국 파국 일보 직전까지
치달은 전쟁을 치루었잖아요.
그게 정확히 언제적이었나요? 가까이 계셨으니 전말을 잘 아시겠지요?
그 부분에 대해서 소하 선생을 아시는 친구들의 회고쪼 입방아가 아까
연회장에서도 많더라구요.
사실 이런 사실은 들어내기 힘든 사생활의 가장 은밀한 부분이라고 생각
됩니다만 그래도 인간으로서의 소하 선생을 파악하는 데에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인도의 성인 간디의 묻어두었던 사랑 이야기도 나옵디다만---."
그동안 좌석의 눈치를 본달까, 분위기를 관망해오던 문예지의 편집국장이
이제는 술로 잘 익은 얼굴을 하고서 질문을 하였다.
'은밀한 사생활' 부분을 질문 받은 미망인은 그러나 힘든 기색없이 얼른
응대를 하였다.
"네, 제가 이번에 문집을 만들 때 소하 선생께서 예전에 봉직했던 대학의
학과에 계시는 그 분의 젊은 제자 교수님이랑, 또 여기 이지함 교수님의
도움과 자문을 꽤 많이 받았지요.
저기 잡지사 편집국장님이야 아예 이번 출판 작업의 머슴 노릇을 자처
하셔서 돌아가신 그 분의 친구들과 인터뷰도 많이 하셨구요.
서교수님도 안식년을 나가지 않으셨으면 제가 자문을 구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런 편찬 과정에서도 사생활 부분들은 암묵적으로 넘어간 데가
많았지요,
저는 소하 선생님이 부인과 이혼 직전까지 간 그 전쟁의 원인 제공자로
전쟁의 중심부에 있었으니 참으로 할 말이 많았지만 문집에서는 모두
뺐지요,
돌아가신 분들이 결코 반론할 수 없는 이 마당에 그분들이 일군 사랑의
본질과 또 그 변질을 왈가왈부한다는게 주제넘기도 하고 분명히
또하나의 오해의 출발점이 될듯 싶었어요.
그러니 문집에도 넣지 않았던 사실들을 이제와서 다시 재론 하고
싶지는 않군요. 용서해 주세요---."
"편집국장님의 질문에서 제가 덕을 좀 볼까했는데 역시 결론이 너무
깔끔해서 얻을게 없군요. 하하하.
네, 저도 잘 알겠습니다. 다만 문집의 제작 과정에서도 그렇게 논의가
활발했었고, 마침내는 빼고 말았다는 깊은 사랑 이야기가 지금 다시
이 자리에서 주제가 되고 있는데도 저만 깜깜하다는 사실이 여러모로
한심하고 부끄러울 따름이군요."
서교수가 이교수를 꼿꼿이 쳐다보며 볼멘 소리를 내었다.
"서교수님,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는 마세요. 문집이 나온게 얼마 되지
않았고 모두 비매품이라 광고도 없었구요,
그보다 사실은 제가 제작하신 분들에게 말을 좀 아껴 달라고 부탁했지요.
알릴 곳에 알리더라도 제가 알리겠다고---.
서교수님께는 세권 한 세트로 된 문집을 꼭 봉정토록 하겠습니다,
그건 당연히 그래야겠지죠."
"당연히라니요---. 사실은 제가 지각자라서 할 말이 없습니다. 또 그간
무심했던 죄책감도 이루 말할 수 없구요.
다만 이 시점에서라도 소하 선생님과 여기 앉아계신 미망인께서 언제
재결합을 하셨는지,
그 순애보를 연대기적으로나마 좀 정리해 주시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니 그렇게만 해도 제가 존경하는 소하 선생님의
세계를 재음미, 재구성하여 다시 그려볼 수 있을듯 합니다.
그 정도면 후학으로서는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 교수님. 소하 선생님 이야기라기 보다 제 이야기로
들어주시지요.
여기 두분은 제 미천한 과거사를 이번 출간을 계기로 대략 아시지요만
다시한번 요약을 하겠습니다.
저는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 교사를 하다가 프랑스 문화부에서 해마다
시행하는 해외 프랑스어 교사 및 교수의 재교육 프로그램으로 파리에
갈 기회가 생겼지요.
이 재교육 과정은 프랑스가 국력을 기우리는 사업으로 정말 배울게
많더군요.
저는 파리의 '쌩 제르멩 데 뿌레'에 있는 '시떼', 그러니까 국제 학사에
들어가서 참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소득은 그 곳 프랑스어 교수님과의 결혼이었어요.
소하 선생님께서 부인과 해를 넘기는 전쟁을 치루고 있을 때였지요.
그게 프랑스에서의 제 국제 결혼의 한 큰 원인이 되었는지 어떤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하여간 저는 남편인 '마르셀'을 통하여 제 고독과
상처난 자존심의 일부를 치유받고 싶었고 또 그렇게 되었지요.
파리의 인문학계에서는 그때 이미 실존주의의 감성은 사라지고
이성주의에 입각한 냉엄한 비평의 시대가 전개되었지만 우리 부부는
서로 살을 부비며 고독을 불태워 없애버리고자 했어요.
우리가 살을 부빌때 나는 '연민' '연민'이라고 부르짖거나 '피티! 피티!'
라고 외치면 그는 '피티에, 피티에'라며 프랑스어로 화답하였지요.
코메디 같다고 웃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녀는 건배를 제의하여 술잔을 부딛치더니 얼른 한 잔을 다 비웠다.
"여기 술이 참 좋군요. 맛이 있어요.
하여간 이렇게 전쟁의 원인 제공자가 파리로 사라지면서 서울의 두분은
일단 휴전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십여년간 파리 생활을 하며 한국과는 인연을 끊었지요.
세월은 무서워서 그러는 동안 서울의 소하 선생께서는 정년 퇴임을
하셨는데 그 이듬 해에 연상의 그 사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육개월 후에 이번에는 파리에 있는 제 남편이 느닷없이
세상을 떠났어요.
워낙 저보다 나이가 십여년이나 위이긴 했지만 참 갑작스러웠어요.
저와 선생님이 마침내 결합을 하는 데에는 이러고도 한 두어해가 그냥
지나갑니다.
서로 연락을 끊고 지냈으니 혼자된 소식들을 몰랐었고 알았더라도 어찌
당장에 결합을 하였겠어요.
그러면서도 지금와서 생각하니 그냥 모르고 흘러갔던 그 두해가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군요.
하여간 저는 프랑스인 남편이 작고하고나서도 이년간은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파리 생활을 다 접고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니 공연히 억울하고 누구라
대상도 없이, 아니 사실은 이미 작고하신 줄도 몰랐던 사모님이 가장 큰
대상이 되어 부끄럽기 그지없더군요.
하지만 마르셀이 작고한 다음, 두해를 보내고 나니 고독이 뼛속까지
스며들었어요.
그러면서 선생님 생각이 고문처럼 시시각각으로 저를 짓눌렀지요.
아까 드린 말씀처럼 그 분이 상처를 하신줄은 전혀 모른 상태에서도 이제는
내가 그분과 함께하여도 좋을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직관처럼 제 머리에
꽂혀 들어왔어요.
아니 생각해보면 저는 지난 인생이 모두 소하 선생과의 존경, 연민, 사랑,
그런 것으로 꽉찬 생활이었던 것 같아요.
그것은 그리움의 대상이자 수단이었고 해결해야할 최종의 인생 목표같은
것으로 나를 이끌고 지배했던것 같아요.
그런 기약이 없이 내가 어찌 파리 생활을 감내하며 살았겠어요---.
나는 언젠가는 소하 선생님과 살리라. 그게 살아 생전에 배를 맞대고
사는게 못되면 죽어 뼛가루로라도 섞어 함께 살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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