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에 서 교수는 선약이 있었으나 파기하고 이 교수의 뒷풀이
초대에 응했다.
이 교수와의 인간관계 때문이었다기 보다는 무언가 풀리지 않는 기이감,
석연치 않은 궁금증, 모순감,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상실과 심지어 배반감
등등 때문이었다.
특히 미망인과의 데자뷔, 기시감은 연회장을 나오면서 "두 분 처음
이시지요?" 라는 이지함 교수의 한마디에 완전히 와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정신 노작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논리 위에 세운 추측이 무너지고 불가해의
노예가 되는 순간부터는 정신적 공황의 지경이 아니겠는가.
그날 낮 수상식에서 완전히 붕괴된 심리체계의 형해 일부라도 복원하지
않고서는 일상이 도저히 전과 같을 수는 없다고 판단을 하고 그날에 미리
세워두웠던 다른 계획이나 약속들을 서교수는 모두 없에버렸다.
그는 자기류의 비장함까지 섞은 다음 여섯시의 회동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파이낸스 센터의 지하 술집은 우리 전래의 방식으로 누룩을 띄어서 빚은
전통주가 괜찮아서 국제 학회 같은 때에 외국 학자들을 그리로 가끔 초대
하면서 두 교수의 단골이 된 집이었다.
서교수에게는 참으로 느릿한 것 같던 그 날 저녁 시간이 마침내 오고
네 사람은 조촐하게 전통주의 신전에 모여앉았다.
미망인과 이지함 교수, 잡지사의 국장, 그리고 서 교수였다.
일단 기시감이 깨어지고나서 이제 다시 서 교수가 가까이에서 본 미망인은
과연 예전의 그 사모님이 아니었다.
"아, 이거 여러모로 제가 정초부터 헤메고 헷갈렸습니다. 이지함 교수님의
탓이 큽니다만---."
경황이 없는 중에 술이 몇차례 돌자 서교수가 작정하고 볼멘 소리를
쏟았다.
전통주의 신전에서는 술 김이 제일이지 제사장이고 무수리고 따질 일이
무어야 하는 심사로 그는 입이 헤퍼졌다.
사실 전통주가 만만치 않다.
원래 안동 소주류의 증류주는 중국의 백주, 그러니까 배갈, 러시아의
보드카, 서양의 위스키에 맞먹는 항렬이 아니던가.
우리나라에는 일찌기 고려시대부터 아라비아의 무역상들이 퍼뜨려서
아라끼 술이라고도 하였지.
문인 넷이서 '전통과 개인의 재능'으로 전통주를 농단하였다.
"그래, 사모님은 어디가시고 미망인이 나오셨나요?"
서교수의 혀가 좀 꼬부라졌다.
"그 분은 돌아가셨지요."
미망인이 서늘한 눈빛과 음성으로 천재처럼 시원하게 퍼즐을 풀어주었다.
"네엣?"
그의 꼬부라졌던 혀가 금방 도루 펴졌다.
"서교수가 안식년으로 해외에 나가 있던 전후에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소하 선생님의 부인께서는 부군보다 연세가 세살이나 더 많으셨잖아---."
이지함 교수가 옆에서 거들었다.
"맙소사, 그런줄도 모르고, 젠장. 하지만 이 선배님은 가만 계시고 이 분께,
그러니까 미망인에게 직접 전말을 부탁합시다. 선배님이 거드니까 꼭
조교 학생 같아요."
그는 섭섭한 감정을 이 틈에라도 섞어야 속이 좀 풀리겠다는 심사로
조교라는 표현을 이 순간 아주 만고에 남을 유머로 구사했는데 이교수와
편집국장이 순간 아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미망인은 여유있게 미소 조차 띄면서 그런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경직된 분위기를 확 풀었다.
"아이, 서 선생님,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 철부지 같으셔. 제가 진짜
조교였어요."
"네에?"
서교수가 다시 놀랬다.
"그럼요, 제가 전말을 소상하게 풀어드리죠.
소하 선생님은 동경대학을 김수영 시인하고 같이 다니셨어요.
해방이 되자 문리대로 들어와서 또 불문학을 함께 하셨고요.
선생님은 영어도 참 잘하셔서 신문사 외신부에서도 이름을 날린 진보적
지식인이었어요.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여장부, 김수영 시인의 누이 김수명 선생님도
소하 선생님을 외경스럽다고 어려워했답니다.
선생님께서는 부업으로 그때 YMCA에서 프랑스어와 영어 특강을
하였는데 장안의 인기였고, 특히 낮 시간의 인텔리 주부들이 열광
하였다는 것 아닙니까.
노총각이었던 선생님은 당시 명문 세도가의 며느리와 결혼을 했어요.
무슨 말씀인가하면, 사모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이혼과 재혼을 하였지요.
장안에 난리가 날 수도 있었지만 조용히, 그래요, 많은 이들의 침묵 속의
보호를 받았던 것은 평소 그분의 품성이 워낙 고고, 정일하고 고독한
탓이었을 것입니다.
네, 그래요, 고독이 만유에 고요를 불러왔어요---."
"그럴때 군부 독재가 시작되었고 저항 문인들이 고개를 들었으며 마침내
소하 선생도 대공분실에 붙잡혀 들어가서 옥고를 치루시고---."
이 교수가 또 조금 거들었다.
"조교님은 좀 조용히 계시구요---."
서교수가 제지하였다.
"호호호, 웃어도 되겠네요. 글쎄 제가 바로 조교였다니까요. 선생님은
석방이 되면서 곧장 인연이 있어 학교로 들어오셨는데 학과 동료들
간에도 내내 교류가 별로 없으셨지요.
저는 그즈음 여상을 나와서 은행에 다녔는데 마침 그 대학에 야간부
불문학과가 있어서 들어갔지요.
저희 집안이 좀 어려웠어요.
그런데 은행이 워낙 늦게 끝이나서 맨날 지각 대장을 하였지요.
어느날 선생님이 저를 친구가 하는 개인 회사에 넣어주셨고, 대학을
졸업하고는 선생님 연구실에서 유급 조교를 하면서 대학원에 적을
걸었고 교사 임용고사 준비를 하였지요."
그녀는 석사가 되던 해에 서울 시내 공립학교의 프랑스어 교사 임용
시험에도 합격을 하여서 공립 고등학교의 불어 선생님이 되었다.
대학 때 부터 시작하여 조교 시절을 지낸 그 여러해 동안 그녀는 소하
선생과 사제지간의 선을 넘은 적도, 또 그런 마음이나 분위기도 없었다고
한다.
선생이 그어놓은 금도가 그러하였고 그녀의 맑은 정신세계가 또한
그러하였단다.
"선생님은 항상 찬바람이 나는 분이었어요. 그게 남에게 부는 찬바람이
아니라 그 분 안으로 들어가는 찬바람, 칼바람이었지요.
고독한 분이었어요.
사모님은 평생 호강하셨지요.
번역을 열심히 하셔서 댁에는 항상 가정부를 두었고 또 자식이 없으니
돈 쓸 일도 별로였고 주색잡기와도 거리가 먼 분이었지요.
다만 고전음악 감상을 위한 최고급 오디오를 장만하시고 또 새로운
음향 기기가 나오면 쉴새없이 업 그레이드를 해 나온 일화라던지,
거장들이 작곡, 지휘한 광범한 수량의 LP에 대한 수집열은 당시 서울
장안에서 어지간한 문화인이면 모르는이가 없었지요."
"찬바람, 칼바람 부는 분과 어떻게 사랑을 나누었습니까?"
이 날 모임 중에 미망인이 그 중에서는 나이가 가장 높았으나 모인
네사람이 그저 그만 그만한 초로의 나이들이어서 대화에 성역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서교수가 이날 저녁 조금 아슬아슬하게 대화의 경계를
넘나든 것은 술 탓이 아니라 미망인의 서늘하고 부담없는 언변 덕택
이었는지도 몰랐다.
"글쎄, 그런 질문도 나올 수가 있겠군요. 칼바람이 부는 황야에서 우리는
왜 외투의 깃을 세우고 머뭇거렸던지---, 엄한 스승과 심약한 제자의
사이, 결코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선생님은 가정이 어려웠던 저를 처음부터 안쓰러운 심정에서 동정과
연민으로 보살피셨고, 저는 또 선생님을 존경과 외경으로 대해 오다가
선생님이 영위하시는 부부사, 부부 관계사를 어느 순간 알고부터는
가당찮게도 선생님을 연민의 심정으로 대하였는데---,
그렇게 오래 만나던 어느해 우리 두사람은 각각 아주 어려운 개인 형편을
맞았어요.
지금 와서 구체적인건 묻지 마세요.
그저 흔히 상상 가능한 어려움을 우연히 따로 따로 맞았어요.
서로 그 힘든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생님은 절대 고독의 빗장을 풀고 저를
안았지요.
한번 봇물이 터지고나자 우리 사이는 걷잡을 수가 없었어요.
사실 부인과의 사이가 좋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를 지금 꼭 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이 그러하였고 그것도 한 큰 원인이 되었지요.
그제서야 저는 그 분의 부인을 의식했어요. 질투도 많이 하고 조사반장처럼
조사도 많이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보니 저와는 20년 이상 차이가 난 그 부인께서 나와 외모가 참 많이
닮았구나,
나이만 뻬면---, 그런 사실들도 점차 확인하게 되었다니까요.
그렇다고 소하 선생님이 총각 때의 한번 실수로 강퍅한 유부녀와 어거지
결혼을 했다던지, 그게 억울하여 비슷한 외모의 젊은 여자, 숫처녀,
연민의 조건을 갖춘 제자에게서 대리 충족을 하셨다는 상상도 격에 맞지
않아요.
참, 외모와 아우라가 비슷한 사모님이 속내와 성격은 저하고 달리 매우
급하고 불같았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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