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짧고 행복했던 낚시 여행 (5)

원평재 2007. 3. 2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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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교민들이 고생을 많이 하는군요. 동네에 활력이 없어요.

동포끼리 불쌍하게 보이네요."

별로 불쌍하다는 표정도 없이 주절주절 송정자가 말했다.

"너무 동정하지는 마세요. 이 곳이 이렇게 보여도 알부자들이 많답니다.

미국처럼 한인들이 떼를 지어 살지 않고 또 넉넉힌 표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불쌍한 사람들은 별로 없답니다.

또 장사의 대상이 브라질 사람이어서 한글 간판 크게 내걸지 않고 사는

편이구요.

가끔 한국에서 도망 온 진짜 불쌍한 사람들이 이 동네에 있지요.

여기는 한국과 비자 면제 관계라서 오갈데 없이 나쁜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흘러들어온답니다."

가이드가 좀 기분나쁜 얼굴로 설명을 했다.

 

"여보시오, 가이드 선생! 이 아주머니 말씀에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이 사람은 항상 목에 힘이 들어가는 맛에 사니까.

아, 목에 힘준다는 내 말 이해하실라나---?"

한익준이 아내의 목에 올라온 힘을 좀 꺾으며 참견하였다.

"사장님도 미국 국적이시라면서 한국말 잘 하시네요. 저도 요즈음 고국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와서 서울식 말 솜씨 빠삭합니다요---, 하하하."

가이드의 표정이 순식간에 많이 펴졌다.

"한국 관광객이 많이 온다구요? 그 먼데에서---."

송정자는 남편의 어깃장 놓는 말은 상대도 않고 얼른 관심이 고국의 관광객

사정으로 옮아갔다.

"그럼요. 21일 일정의 패키지 투어로 쏟아져 들어오는데 겁이 날 정도

라니까요.

이러다가 고국이 또 IMF 맞는거나 아닌가 하고 말이지요.

고국이 끝까지 잘 나가줘야지 지구 끝에 와있는 우리도 살기가 편한데---."

"그건 맞는 말이오. 서로가 다 잘되어야지---."

한익준이 깊은 공감으로 가이드의 말을 받았다.

 

IMF 악몽에 고국이 시달리던 동안, 그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우선 한국으로부터 맨해튼에 들리는 여행자가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서

교포 사회도 활력을 잃었다.

한국 여행자들이 잘 들러서 바가지를 쓰고 가는 32번가의 명품점과 식당,

노래방, 카페 등이 파리를 날리자 교민 사회가 전반적으로 긴장을 하여서

소비가 줄었다.

당시 미국의 전반적 경기 상승과는 관계없이 한인 동네의 렌트비는 반으로

떨어졌고 고국으로 부터의 단기 체류자를 받아서 짭짤한 돈을 벌었던

소위 "하숙집"도 빈 방이 속출 하였다.

 

뉴욕과 LA의 집 값과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하여 그 비용의 반쯤이면 되는

조지아 주, 아틀란타로 교민들이 밀려간게 대략  이 때 쯤이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곳에서도 발을 붙이지 못하여 도루 떠났던 곳으로 돌아왔다.

한익준의 처제 중 한사람이 대표적이었다.

 한국 남자들이 동창회 골프 경기를 미국에 와서 하고 여고 동기회가

뉴욕이나 LA에서 열리던 시절이 바로 IMF 직전이었다.

한익준의 처제 하나가 작은 식당을 하다가 이 분위기를 타서 맨해튼의 한국

거리에 보석상을 크게 차렸다.

그런데 동기회 하러 온 여자들이 무슨 구매 사절단이나 된듯 경쟁적으로

보석과 명품을 사느라 야단법석을 떨던 시절이 한 해쯤 지나더니 발길이

끊기고 생전 듣도 못한 IMF라는 말이 국내외 모든 한국인들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의 처제가 모기지로 차렸던 보석 가게는 한인들의 발길이 뜸하자 당연히

빚더미에 넘어갔다.

그 부부는 보석상을 차린 책임을 서로에게 밀며 허구한날 싸움이더니

마침내 남편이 파산 신청과 함께 별거 신청까지 법원에 내었다.

그녀는 자신의 빚을 남편에게 넘기고 아틀란타로 야반 도주를 하다시피

했는데 그 곳에서도 다시 교포로 부터 사기를 당하여 남은 돈을 날렸다.

여자가 혼자 온걸 이용한 날건달 조직이 개재된듯 하였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맨해튼으로 되돌아와서 남편과는 합치지도 못하고

혼자서 여자 택시 기사를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유혹이 많다고 가끔 "칸 델리"에 와서 형부인 한익준에게 한탄도 하였다.

파랑새던가 노랑새던가 하는 콜 택시 회사에서 밤낮으로 뛰기를 마다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그는 친 언니보다 더 애처로워했다.

 

사실은 그도 모기지로 산 집값을 갚으랴, 고등학생인 두 아이의 과외비

까지 겹쳐서 정신을 못차릴 때였다.

미국까지 와서 과외라니 한심하였지만 교포 사회가 모두 그러는데 언제

무슨 후회를 하고 또 자식들로부터 나중에 무슨 원망을 들으랴 싶어서

그들은 개인 과외비와 학원비를 아낄수도 없었다.

다만 그의 가게는 이제 한인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세월을 만났다.

히스패닉들이 그 가게 길목을 아침 저녁으로 누비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건지, 어려웠던 시절을 그들은

히스패닉 덕분에 쉽게넘겼고 이 과정에서 그의 스페인어는 돋보였다.

하긴 따지고보면 스페인어에  처음 접한 그의 아내가 대화에서는 더 잘

통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팔자는 모두 성격탓인지도 몰랐다.

 

고국이 긴 IMF의 터널을 그럭저럭 빠져나와서 양극화니 뭐니 시비는

붙었지만 돈 많은 한인들이 다시 뉴욕 바닥에 들끓기 시작하였고, 

맨해튼의 상점들은 다시 동포들에게 봉사와 함께 바가지도 씌우면서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다.

 

"아니, 뭘해요?"

송정자가 생각에 잠긴 남편을 한인 골목에서 쿡 찔렀다.

"응, 처제 생각---!"

"이 양반이 싱겁긴---."

"한국 관광객이 쏟아져 들어온다면서 우리 두사람만 상대하니까 좀 손해

아닌가요?"

"걱정 놓으십시오. 여기 가이드 연합에서 돌아가면서 순번제로 하니까

어차피 제 차례이고 괜찮습니다.

또 지금 한국이 다시 조금 불황인가 합니다.  땅값 보상인가 하는걸 받은

사람들이나 들어오지 요즈음 관광객들이 많이 줄었어요.

사실은 중국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 들어옵니다. 우리보다 열배는 더

들어 올걸요---."

 

이윽고 저녁 시간이 돌아와서 두사람은 호텔로 향했다.

"상 파울로에 보실 것도 변변치 않지만 미국 여행사에서 보낸 팩스를 보니까

내일 새벽에 떠나시는 일정이더라구요. 너무 바쁜 걸음 아니신가요?

아니면 전에 여기 왔다가셨거나---."

"아니 이제 나이도 있고해서 막 돌아다니는 관광은 못하겠고 재미도 없어서

이과수 폭포나 가보고 곧장 아마존에 들어가서 며칠 쉬다가 뉴욕으로 돌아

갈까 합니다.

뉴욕이 춥잖아요.

뉴욕 추위에 골병이 들어서 아마존에서 좀 원기를 차려서 갈려구요."

"아, 참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제 한인들도 관광 개념을 좀 바꾸어야 할 것

같아요.

증명사진만 찍으러 다니지 말고 휴양을 하셔야지요."

가이드가 반색을 하였다.

 

 

 

"아이구, 나는 반대라요.

우리가 무슨 관광을 많이 다녔다고---. 나이아가라하고 그랜드 캐년 한번

다녀온 것 뿐이라구요.

요세미테도 옐로우스톤도 못가봤는데 휴양이 무슨 휴양입니까.

유명한 곳으로 막 돌아다니며 사진 좀 팍팍 찍어 가서 자랑도 해야하는데

비싼 돈 들여 남미까지 와서 너무 억울해요, 억울해!"

"이 보시게, 요즈음 관광 사진 누가 봐주기나 하던가. 우리도 남들이 관광

갔다 온 이야기 꺼내면 질려버리잖아---."

"그럼 다음에는 교회에서 하는 중동의 성지순례에는 꼭 따라가요.

갔다온 사람들이 성지 이야기하니 교인들이 그건 외면하지 못합디다.

호호호." 

"걱정 마시게. 우리도 리오데 자네이루에 가서 저 거대한 예수님 상도 보고

코파 카바나 해변도 눈요기는 할테니까---."

 

 

(계속)